이춘부(李春富)의 본관은 양성(陽城)이다. 할아버지는 양성군(陽城君) 이천(李梴)이며, 할머니는 해평윤씨(海平尹氏) 윤만비(尹萬庇)의 딸이다. 아버지 이나해(李那海)는 충숙왕 대에 첨의평리(僉議平理)를 역임하였고, 어머니는 경주김씨 계림군(鷄林君) 김자흥(金子興)의 딸이다. 이춘부는 공암허씨 허선(許僐)의 딸과 혼인하여 5남 1녀를 두었다. 장남 이옥(李沃)은 조선 태종 대에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를 지냈으며, 차남 이윤(李贇)은 진주목사로 왜구와 전투 중 사망하였다. 3남은 이예(李裔), 4남이 이한(李澣), 5남이 이징(李澂)이다. 딸은 이색(李穡)의 아들인 이종학(李鍾學)과 혼인하였다.
이춘부는 1349년( 충정왕 1) 윤 7월 인사에서 삼사좌윤(三司左尹)에서 우대언(右代言)으로 승진하고, 이듬해 5월에 밀직부사(密直副使)로 전보되었다. 공민왕 5년 관제 개편에 따라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가 되었다가 1358년(공민왕 7) 2월 인사에서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로 승진하고, 이듬해 8월 인사에서는 추밀원의 수장인 판추밀원사(判樞密院事)가 되었다.
이춘부는 왜구(倭寇)와 홍건적(紅巾賊)의 침입을 방어하는 데에 힘써 공을 세웠다. 1358년(공민왕 7) 5월에 왜적(倭賊)이 착량(窄梁)을 침탈하자 방어사(防禦使)와 서강병마사(西江兵馬使)를 겸하여 왜구를 토벌하였으며, 1360년 5월 왜구 침입으로 개경에 계엄령을 내려야 할 정도로 상황이 심각해지자 이춘부는 동강도병마사(東江都兵馬使)가 되어 군사를 징발하고 왜구 토벌을 지휘하였다.
1359년(공민왕 8) 12월 홍건적의 1차 침입 때에는 서경윤(西京尹)으로 위촉되어 평양에 주둔하면서 침입에 대비하였다. 1361년 10월, 홍건적의 2차 침입으로 왕이 안동으로 몽진(蒙塵)할 때, 이춘부는 시중 홍언박(洪彦博) 등과 함께 왕을 호종(扈從)하는 한편, 전라도 도순문사 겸 병마사(全羅道都巡問兼兵馬使)가 되어 전시 상황에 대비하였다. 홍건적을 격퇴하여 개경을 수복(收復)하고 김용(金鏞)의 흥왕사(興王寺) 난을 진압한 후, 1363년(공민왕 12) 이춘부는 군사들을 소집해 왕을 보좌한 공로〔僉兵輔佐功〕로 1등공신에 봉해져 수성보절공신(輸誠保節功臣)의 칭호를 받았다.
신돈(辛旽)이 집권하면서 이춘부는 지지 세력으로 활동하여 그 지위를 높였다. 1365년 5월 인사에서 도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로 발탁된 이춘부는 신돈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린 대간(臺諫) 정추(鄭樞)와 이존오(李存吾) 등을 국문하는 일을 맡는가 하면, 전민추정도감(田民推整都監)이 설치되어 개혁을 추진할 때 권세가의 전민 탈점을 조사하고 환수 조치하는 일을 담당하였다.
1368년(공민왕 17) 8월, 이춘부는 마침내 수상인 도첨의시중(都僉議侍中) 직에 올랐고, 이해 10월 김정(金精) 등이 신돈을 주살하려는 모의를 국왕에게 보고하여 저지하게 하는 공을 세워 충근절의동덕찬화공신(忠勤節義同德贊化功臣)의 칭호를 하사받았다. 『고려사』 찬자(撰者)는 이춘부의 이 같은 출세가 “신돈에게 아첨하고 왕의 비위를 힘써 맞춘 덕”이라고 비판하였다.
1371년(공민왕 20) 7월 신돈의 실각과 함께 이춘부와 그의 가족도 몰락하였다. 이해 7월 11일 신돈이 유배지 수원(水原)에서 주살된 뒤, 7월 27일에 이춘부가 처형되었고, 그의 동생 이원부(李元富)와 이광부(李光富)도 신돈의 일당이라는 죄목으로 유배되었다. 이춘부의 아들 이옥(李沃) · 이윤(李贇) · 이예(李裔) · 이한(李澣) · 이징(李澂) 등도 모두 관노로 적몰되어 각 고을에 나누어 예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