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중(郎中)·원외랑(員外郎)과 함께 좌우사(左右司)를 구성하며, 품질(品秩)은 종7품, 정원은 2인이었다.
고려에 정동행성이 처음 설치된 것은 1280년(충렬왕 6)이지만, 낭중 이하의 속관을 둔 것은 1288년안향(安珦)이 원외랑에 임명되면서부터이므로 도사 역시 이 무렵에 설치되었을 것이다.
원나라의 관직임에도 불구하고 정동행성의 다른 속관들과 마찬가지로 고려 사람으로만 충원되었으며, 특히 고려의 고위관리로써 임명하는 것이 원칙이었던 듯하다.
또한, 언제나 정원이 충원되어 있지는 않았으며, 충렬왕 때 박전지(朴全之)·장유(張瑜), 충목왕 때 신인적(申仁適)·악우장(岳友章), 충정왕 때 이인복(李仁復), 공민왕 때 이공수(李公遂)·최개(崔介) 등의 임명사례가 확인되고 있다.
1356년(공민왕 5) 반원개혁(反元改革)의 일환으로 정동행성이문소(征東行省理問所)가 혁파되고 곧이어 좌우사가 혁파됨으로써 폐지되었다가, 1361년 좌우사의 부활과 더불어 다시 두었다. 그러나 1388년(우왕 14)이성계(李成桂)의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 직후 정동행성이 완전히 혁파되면서 같이 없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