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는 고려와 남송, 일본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일 뿐만 아니라 전략상의 요충지였다. 원은 일찍부터 탐라에 관심을 보여 고려를 통해 탐라 사신의 입조(入朝)를 종용하고 흑산도와 탐라를 살펴보기 위해 두차례 사신을 파견하기도 하였다. 원은 1273년(원종 14) 제주로 거점을 옮겨 항쟁하던 김통정(金通精) 휘하의 삼별초(三別抄)를 토벌한 후 탐라국초토사(耽羅國招討司)를 설치하고 제주를 원의 직할령으로 편입시켰다. 원이 초토사를 설치한 목적은 삼별초 잔여세력의 토벌과 탐라 주민에 대한 초무(招撫)는 물론 일본 경략과 남송 정벌을 위한 전략기지로 삼고자 한 것이다.
그 후 원은 탐라국초토사를 군민도달로화적총관부(軍民都達魯花赤總管府)로 개칭하고 목마장을 설치하는 등 일본정벌 계획을 추진하였다. 2차례에 걸친 일본원정 실패 후 1284년(충렬왕 10)에는 다시 군민안무사(軍民按撫使)로 명칭을 바꾸고 진수군을 증설하였다. 10년 후인 1294년(충렬왕 20)에 원세조가 죽고 성종이 즉위한 후 일본원정 계획이 백지화되면서 원은 충렬왕의 환부 요청을 받고 탐라를 돌려주었다.
고려는 탐라를 제주로 고치고 목사(牧使)를 파견하였다. 그러나 반환 이후에도 원은 공마(貢馬)의 진상을 계속 요구하였고 1300년(충렬왕 26)에는 목마장 관리 등을 구실로 원은 다시 제주에 탐라총관부(耽羅總管府)를 설치하였다. 이듬해인 1301년(충렬왕 27)에 고려에서 왜구 방지 등을 이유로 진수(鎭戍) 기관인 만호부로 대체할 것을 원에 요청하여 승낙을 얻어냄으로써 탐라만호부가 설치되었다. 이후 탐라만호부는 정동행성(征東行省)에 소속되어 계속 목마장으로 이용되다가 공민왕대 펼쳐진 반원운동(反元運動)으로 폐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