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해주(海州). 일명 최경(崔璟). 아버지는 폐신(嬖臣) 최안도(崔安道)이며, 형은 역신(逆臣) 최유(崔濡)이다.
아버지의 힘으로 어려서 과거에 급제하여, 1349년(충정왕 1) 좌대언(左代言)·개성윤(開城尹)에 이어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역임하였다.
1352년(공민왕 1)에는 교동(喬桐) 갑산창(甲山倉)에 침입한 왜구를 격파하여 진력협모공신(陳力恊謀功臣)이 되고, 밀직부사(密直副使)에 임명되었다. 이 해에 최영(崔瑩)·안우(安祐) 등과 함께 조일신(趙日新)의 난을 평정하고, 왕의 총애를 받았으나 이를 시기하던 재상 김보(金普)의 무고로 순군옥(巡軍獄)에 갇혔다가 광양감무(光陽監務)로 좌천되었다.
1354년 원나라에서 장사성(張士誠)의 토벌을 위하여 고려에 원병을 청하자, 용성군(龍城君)에 봉하여진 뒤 출정하였다가 돌아왔다. 우왕이 즉위하자 판종부시사(判宗簿寺事)로 사신이 되어 명나라에 건너가 공민왕의 상(喪)을 고하고, 시(諡) 및 승습(承襲)할 것을 청하였다.
그곳에서 3년간이나 억류되었다가 1378년(우왕 4) 6월에 풀려나 귀국하였는데, 이해 9월 사헌부에서 “최원이 명경(明京)에 있을 때 본국의 일을 잘못 말하여 사신의 임무를 다하지 못하였다.”고 탄핵하여 옥에 갇히고, 국문을 받던 중 불복(不服)하다가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