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안도 ()

고려시대사
인물
고려 후기, 충숙왕의 폐신으로 고려와 원나라에서 관직 생활을 한 관료.
이칭
초명
최나해(崔那海)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294년(충렬왕 20)
사망 연도
1340년(충혜왕 복위 1)
본관
해주(海州)
주요 관직
응양군 상호군, 동지밀직사사
관련 사건
입성책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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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최안도는 고려 후기 충숙왕의 폐신으로 고려와 원나라에서 관직 생활을 한 관료이다. 충선왕이 세자 시절 원나라에 머물 때 그를 섬기면서 한어와 몽골어를 익혔다. 고려에서는 동지밀직사사, 감찰대부 등을 거쳤으며, 원나라 관직으로는 태부감태감 등을 역임하였다. 주로 충숙왕의 폐신으로 활동하였다.

정의
고려 후기, 충숙왕의 폐신으로 고려와 원나라에서 관직 생활을 한 관료.
가계 및 인적사항

본관은 해주(海州). 초명은 최나해(崔那海). 선대는 용주(龍州: 현, 경상북도 예천군)에 옮겨 살았다고 한다. 아버지는 검교첨의평리(檢校詹議評理) 상호군(上護軍) 최현(崔玄)이다. 어머니 김씨(金氏)는 궁비(宮婢) 출신이었다. 봉익대부(奉翊大夫) 구예(具藝)의 딸과 혼인하여 최유(崔濡)· 최원(崔源)·최숙신(崔淑臣)·최문구(崔文丘) 등 아들 넷과 인당(印璫)에게 시집간 첫째 등 딸 넷을 두었다.

주요 활동

충렬왕(忠烈王) 재위 말년에 무관으로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어려서 아버지를 따라 당시 세자였던 충선왕(忠宣王)주1 원(元)나라 대도(大都)에 머물면서 한어(漢語)와 몽골어를 익혔다.

충숙왕(忠肅王)이 즉위한 뒤에는 왕을 위해 노고를 다해 총애를 받으며 거듭 승진하였다. 1321년(충숙왕 8) 충숙왕이 심양왕(瀋陽王) 왕고(王暠) 일파의 참소로 원나라에 들어가 오랫동안 억류되어 있을 때 그를 성심으로 시종(侍從)하였다. 이때 오잠(吳潛)유청신(柳淸臣) 등이 고려에 행성(行省)을 설치하여 원나라 내지(內地)와 같게 하자는 주장( 입성책동(立省策動))을 하였는데, 이를 저지하는 데 공을 세웠다. 이에 1327년(충숙왕 14)에는 무관의 최고위직인 응양군(鷹揚軍) 상호군(上護軍)까지 올랐으며, 일등공신으로 책봉받았다.

이 무렵 충숙왕이 정치를 돌보지 않자 김지경(金之鏡)·신시용(申時用)과 중 조륜(祖倫) 등과 함께 권력을 잡았다. 그런 다음 벼슬을 팔고, 부정한 재판으로 뇌물을 받는 등 행동을 함부로 하였다. 1331년(충혜왕 1) 충혜왕(忠惠王)이 즉위한 후에도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 감찰대부(監察大夫)에 임명되었으며, 정동행성(征東行省) 좌우사원외랑(左右司員外郞)이 되었다.

그러나 곧바로 원나라에 소환되어 숙위(宿衛)하면서 원나라의 관료로 활동하여, 마지막에는 정4품 중의대부(中義大夫) 태부감태감(太府監太監)에 이르렀다. 이 기간에 1332년(충숙왕 복위 1)과 1340년(충혜왕 복위 1) 두 차례 고려에 사신으로 파견되기도 하였다. 두 번째 사신으로 왔다가 병이 들어 사망하였다.

참고문헌

원전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졸고천백(拙藁千百)』 「최태감묘지(崔大監墓誌)」

단행본

김광철, 『원간섭기 고려의 측근정치와 개혁정치』 (경인문화사, 2018)
이명미, 『13~14세기 고려·몽골 관계 연구』 (혜안, 2016)
주석
주1

남을 따라다니며 곁에서 심부름 따위의 시중을 들다.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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