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렬왕(忠烈王) 재위 말년에 무관으로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어려서 아버지를 따라 당시 세자였던 충선왕(忠宣王)을 주1 원(元)나라 대도(大都)에 머물면서 한어(漢語)와 몽골어를 익혔다.
충숙왕(忠肅王)이 즉위한 뒤에는 왕을 위해 노고를 다해 총애를 받으며 거듭 승진하였다. 1321년(충숙왕 8) 충숙왕이 심양왕(瀋陽王) 왕고(王暠) 일파의 참소로 원나라에 들어가 오랫동안 억류되어 있을 때 그를 성심으로 시종(侍從)하였다. 이때 오잠(吳潛)과 유청신(柳淸臣) 등이 고려에 행성(行省)을 설치하여 원나라 내지(內地)와 같게 하자는 주장( 입성책동(立省策動))을 하였는데, 이를 저지하는 데 공을 세웠다. 이에 1327년(충숙왕 14)에는 무관의 최고위직인 응양군(鷹揚軍) 상호군(上護軍)까지 올랐으며, 일등공신으로 책봉받았다.
이 무렵 충숙왕이 정치를 돌보지 않자 김지경(金之鏡)·신시용(申時用)과 중 조륜(祖倫) 등과 함께 권력을 잡았다. 그런 다음 벼슬을 팔고, 부정한 재판으로 뇌물을 받는 등 행동을 함부로 하였다. 1331년(충혜왕 1) 충혜왕(忠惠王)이 즉위한 후에도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 감찰대부(監察大夫)에 임명되었으며, 정동행성(征東行省) 좌우사원외랑(左右司員外郞)이 되었다.
그러나 곧바로 원나라에 소환되어 숙위(宿衛)하면서 원나라의 관료로 활동하여, 마지막에는 정4품 중의대부(中義大夫) 태부감태감(太府監太監)에 이르렀다. 이 기간에 1332년(충숙왕 복위 1)과 1340년(충혜왕 복위 1) 두 차례 고려에 사신으로 파견되기도 하였다. 두 번째 사신으로 왔다가 병이 들어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