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해주(海州). 초명은 최나해(崔那海). 검교첨의평리상호군(檢校詹議評理上護軍) 최현(崔玄)의 아들이다. 선대는 용주(龍州)에 옮겨 살면서 한미해진 것 같다. 어머니가 궁비(宮婢) 출신이라는 것 외에는 아버지의 이름조차 전해지지 않는다.
천한 신분이었으나 일찍이 충선왕을 따라 연경(燕京)에 있으면서 몽고어와 한어(漢語)를 익혀 출세의 기반으로 삼았다.
충선왕 때에는 조적(曺頔)의 참소로 한때 해도(海島)에 유배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충숙왕이 즉위한 뒤 바로 아래에서 노고를 다함으로써 폐신이 되어 전토가 하사되었다. 그 뒤 1319년(충숙왕 6) 호군(護軍)에 올랐다.
1321년 충숙왕이 심양왕 왕고(瀋陽王 王暠) 일파의 참소로 원나라에 들어가 5년 간 억류되어 있을 때, 성심으로 시종(侍從)하였다. 그 공으로 1325년 귀국해 전민(田民)이 하사되었다. 이듬해에는 대호군에 올랐고, 1327년 응양상호군(鷹揚上護軍)으로 1등공신이 되었다.
이 무렵 충숙왕이 정치를 돌보지 않자 김지경(金之鏡)·신시용(申時用)과 중 조륜(祖倫) 등과 함께 권력을 잡았다. 그런 다음 벼슬을 팔고, 부정한 재판으로 뇌물을 받는 등 행동을 함부로 하였다.
또한, 대간(臺諫)의 상소문을 중간에서 가로채 임금에게 전달되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나 1321년과 1322년에 있었던 오잠(吳潛)과 유청신(柳淸臣)의 제2차 입성책동(立省策動: 元으로 하여금 고려에 行中書省을 설치하도록 획책한 사건)을 저지해 공로를 인정받았다.
그래서 다른 공로자들과 함께 토지 100결(結)과 노비 10구(口)가 하사되었다. 그럼으로써 전후에 왕으로부터 받은 토지가 수백 결이었고, 노비는 수십 구에 이르렀다. 1331년(충혜왕 1) 감찰대부를 역임하고, 동지밀직사사에 올랐다.
한편, 원나라에서 받은 관직은 정동행성좌우사원외랑(征東行省左右司員外郎)·중상감승(中尙監丞)·태부대감(太府大監) 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