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능성(綾城). 아명은 정득(丁得). 호는 연암(蓮庵). 경상남도 진주 출신. 아버지 구재서(具再書)와 어머니 진양하씨(晉陽河氏)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920년 같은 마을 허만식(許萬寔)의 딸 허을수(許乙壽)와 혼인하여 구자경(具滋暻) 등 6남 4녀를 두었다. 홍문관 시독관(侍讀官)으로 있던 할아버지 구연호(具然鎬) 밑에서 한학을 익히다가 지수보통학교 2학년에 편입하여 3학년에 중퇴하고, 중앙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여 2년을 수료하였다.
1931년에 진주에서 동생 구철회(具哲會)와 함께 구인회상점을 설립하여 포목상으로 첫 사업을 시작하였다. 1947년 화장품을 생산하는 낙희화학공업사(樂喜化學工業社)를 설립하여 제조업에 참여한 후 수지(樹脂)·치약 등을 생산하면서 기업을 키워나갔다.
1959년에는 주식회사 금성사를 설립하여 국내 최초로 라디오·선풍기·텔레비전 등 전기·전자기기를 생산, 수출하였다. 1969년에는 반도체(半導體) 생산회사인 금성전자주식회사를 설립하여 첨단산업분야에도 진출하였고, 호남정유 여수공장을 완공함으로써 정유업에도 참여했다.
한편 언론사업에 관심을 가지고 동양방송(TBC)의 설립에 참여했으며, 부산문화방송과 『국제신보(國際新報)』를 인수하여 경영했다. 1964년에는 한국경제인협회 부회장을 역임하였으며, 작고 직전인 1969년에 연암문화재단(蓮庵文化財團)을 설립하여 장학육영(奬學育英)·문화·사회복지사업에 기여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일제 식민지하에서는 상업에 종사하였으나, 광복 이후에 기업을 설립하여 1960년대 이후의 경제성장 과정에서 럭키금성(지금의 LG) 재벌을 형성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