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태종 승려인 정명국사(靜明國師) 천인이 말년에 시고를 모아 편찬한 시집으로 추정된다. 『정명국사시집(靜明國師詩集)』은 3권으로 현재 전하지 않지만 『동문선(東文選)』에 18편이 실려 있어 그 대강을 알 수 있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권250에 “『정명국사시집』 3권은 고려 승려 천인이 지었다.[靜明國師詩集三卷 高麗僧天因著]”라고 기술되어 있다. 또 『동문선』 권83에 「만덕산 백련사 정명국사시집 서(萬德山白蓮社靜明國師詩集序)」가 있고, 『해동문헌총록(海東文獻總錄)』에 ‘만덕산 백련사 정명국사시집’이 실려 있어 천인이 저술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천인은 만덕산 백련사 제2세주로, 백련사의 원묘국사(圓妙國師) 요세(了世, 1162∼1245)에게 참학 득도하였다. 실존하는 글을 중심으로 『정명국사시집』을 재구성하면 먼저 책머리에 「서문」이 들어가고 편린적으로 남아있는 시가 그 다음을 구성한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임계일(林桂一)이 쓴 서문에는 어떤 도인(道人)의 행장과 시집을 참고하여 출가 전의 활동, 원묘국사의 천태교관(天台敎觀) 전수 과정, 문인 원완(圓皖)에게 법통을 전하면서 남긴 말, 입적(入寂) 과정, 『정명국사시집』 편찬 과정 등 천인의 유적을 대략 서술한다고 밝히고 있다. 특히 시집의 편찬과정에서 많은 시문이 있었지만 십중팔구(十中八九)는 유실되어 말년의 유고를 여러 편 수습하여 향사(香社)에 제명(題名)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현재 『동문선』에 전하는 천인의 시를 통해 그의 시풍과 사상을 알 수 있는데, 그의 시 18편은 다음과 같다.
① 「완상인의 산중지역에 답하여[次韻晥上人山中作]」(『동문선』 권4, 오언고시)
② 「서상인이 용혈에서 경을 베끼고 시를 지어 보이기에 그 운을 따라 화답하여[誓上人在龍穴寫經有詩見贈次韻奉答]」(『동문선』 권4, 오언고시)
③ 「사선암에 놀면서[遊四仙嵓有作]」(『동문선』 권4, 오언고시)
④ 「치원암 주인이 내게 시를 보이고, 이내 내게 산중의 고사를 적기를 청하기에, 그 운을 따라 화답하여[致遠庵主以詩見示仍以請予紀山中故事次韻答之]」(『동문선』 권6, 칠언고시)
⑤ 「원상인이 척촉의 주장을 선사함에 사례하여[謝圓上人惠躑躅柱杖]」(『동문선』 권6, 칠언고시)
⑥ 「해월루 간월(海月樓看月)」(『동문선』 권6, 칠언고시)
⑦ 「기 옥주서상인(寄沃洲誓上人)」(『동문선』 권6, 칠언고시)
⑧ 「제 권학사 법화탑(題權學士法華塔)」(『동문선』 권6, 칠언고시)
⑨ 「병으로 있을 때 운주숙 대로가 내게 솔과 전나무의 그림을 보이기에[病中雲住叔大老見示松檜圖]」(『동문선』 권6, 칠언고시)
⑩ 「운상인의 병중에 지은 시를 차운하여[次韻雲上人病中作]」(『동문선』 권11, 오언배율)
⑪ 「조승제(趙承制)를 조상하는 청곡로(靑谷老)의 시를 차운한다[次韻靑谷老弔趙承制]」(『동문선』 권14, 칠언율시)
⑫ 「배가 남해에 닿자 안질을 얻어 상적법주(常寂法主)에게 부침[舟次南海得眼疾寄常寂法主]」(『동문선』 권14, 칠언율시)
⑬ 「시로써 편지를 대신하여 최 학사(崔學士)에게 답하며[以長句代書答崔學士]」(『동문선』 권14, 칠언율시)
⑭ 「다시 화답하며[再和]」(『동문선』 권14, 칠언율시)
⑮ 「홍영상인이 시를 주기로 차운(次韻)하여 답하며[洪英上人以詩見贈次韻答之]」(『동문선』 권18, 칠언배율)
⑯ 「차운하여 환상인에게 답하며[次韻答晥上人]」(『동문선』 권18, 칠언배율)
⑰ 「냉천정(冷泉亭)」(『동문선』 권20, 칠언절구)
⑱ 「설법대(說法臺)」(『동문선』 권20, 칠언절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