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흥(憬興)의 행적에 대해서는 『삼국유사』에 수록된 2편의 글을 통해 대략적인 내용을 파악할 수 있다. 그의 성은 수(水)씨이고, 웅천주(熊川州) 출신이다. 신라의 문무왕이 681년 세상을 떠나면서 신문왕에게 경흥을 국사로 삼으라는 명을 내렸고, 신문왕은 즉위한 다음 그를 국로(國老)로 삼고 삼랑사(三郞寺)에 주1하게 하였다. 『삼국유사』에는 경흥과 관련하여 관음보살과 문수보살이 현신한 2편의 일화가 소개되어 있다. 한편 경흥의 저술 가운데 『금광명최승왕경약찬』이 있는데, 『금광명최승왕경』은 당의 주2이 703년 한역하였고, 사신인 김사양(金思讓)이 704년 신라로 가져왔으므로, 그의 입적 연대는 704년 이후로 추정된다. 그는 신라에 있어 원효, 태현 다음으로 많은 저술을 남긴 인물이다.
『무구칭경소』는 6권으로 기재되어 있지만, 현존하지 않는다.
경흥의 『무구칭경소』 6권은 현존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의 구성과 내용을 파악하기 어렵다. 다만 그가 주석한 경이 주3의 여러 이역본 가운데 현장(玄奘, 주4이 650년 3월에 시작하여 9월에 한역을 마친 『설무구칭경(說無垢稱經)』 6권이라는 점이 주목된다. 현존하는 『유마경』의 이역본으로 현장의 한역본 이전에 지겸(支謙)의 『불설유마힐경(佛說維摩詰經)』 2권과 주5의 『유마힐소설경(維摩詰所說經)』 3권이 있다. 이들 3종의 『유마경』 이역본 가운데 가장 널리 유통되는 것은 구마라집의 한역본이고, 산스크리트 원본을 가장 잘 반영한 것은 현장의 한역본으로 평가된다. 현장의 한역본은 6권 14품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품명 가운데 다른 2종의 이역본과 조금씩 다른 부분이 있다. 이 경은 기본적으로 반야의 공사상에 기반하여 대승 보살의 실천도를 널리 알리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경흥의 『무구칭경소』 6권은 아마도 현장 역 『설무구칭경』 6권을 충실히 해설한 주석서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장의 한역본이 나온 이후 당의 주6가 『설무구칭경소(說無垢稱經疏)』를 지었지만, 규기 이전에는 구마라집의 한역본에 대한 주석서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므로 경흥의 『무구칭경소』는 현장이 한역한 경을 대상으로 진행된 우리나라 최초의 주석서로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