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제(忌祭)는 사람이 사망한 후에 해마다 죽은 날인 기일(忌日)에 지내는 제사이다. 고대에는 기일에 제사를 지내는 풍속이 없었고 송대 이후에 비로소 생겨났다고 한다. 이후 『가례』에 기일제가 명시되면서부터 조상 제례의 하나로 자리잡았으며, 주자가례가 조선에 도입되고 나서 효(孝)에 입각한 성리학적 실천 윤리를 강조하는 분위기에 힘입어 기제사(忌祭祀)를 중시하게 되었다. 『가례』에 따르면 기제사는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고조부모까지 4대 봉사가 원칙이며, 기일을 맞이한 조상의 신위만을 모시는 단설(單設)로 지내도록 되어 있다.
『가례(家禮)』의 「제례」편에는 모두 6종류의 제례가 소개되어 있다. 사계절의 가운데 달(음력 2, 5, 8, 11월)에 지내는 사시제(四時祭), 시조에 대한 초조제(初祖祭), 시조 및 고조 이하를 위한 선조제(先祖祭), 아버지에게 올리는 예제(禰祭), 기일에 지내는 기일제(忌日祭), 묘소에서 행하는 묘제(墓祭)가 그것이다.
기일제의 근원에 대한 의견은 분분하다. 『가례집람(家禮輯覽)』의 「제례」에는 “장자[張載]는 옛날 사람들은 기일에 음식을 올리는 예를 행하지 않고, 다만 슬픔을 다해 일상과 다른 모습을 보여 줄 따름이었다.”라는 내용이 있으며, 『주자어류(朱子語類)』에는 “옛날에는 기제사가 없었는데, 최근 학자들이 여러 가지를 고찰하여 지금에 이르렀다.”라고 되어 있다. 이처럼 고대에는 기일에 제사를 지내는 풍속이 없었으나 송대(宋代) 이후에 비로소 생겨났고, 『가례』에 기일제가 명시되면서부터 조상 제례의 하나로 자리잡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주자가례(朱子家禮)가 조선에 도입되고 나서 효(孝)에 입각한 성리학적 실천 윤리를 강조하는 분위기에 힘입어 기제사(忌祭祀)를 중시하게 되었다.
『가례』에는 기제사 대상을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고조부모로 4대조까지로 명시하고 있으나, 옛 예법에는 신분에 따라 차등적으로 규정되어 있다. 『예기(禮記)』에서는 “왕(천자)은 7묘(廟), 제후는 5묘, 대부는 3묘, 적사(適士)는 2묘, 관사는 1묘를 세우고, 서사(庶士)와 서인(庶人)에게는 묘가 없다.”라고 계층에 따라 대상의 차이를 두고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조선시대 『경국대전(經國大典)』과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도 신분별로 대수(代數)가 제한되어 있는데, 『경국대전』에 “문무관 6품 이상은 3대를 제사 지내고, 7품 이하는 2대를 모시고, 서민은 부모만을 제사 지낸다.”라는 내용이 명시되어 있다. 그럼에도 주자가례가 본격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하는 조선 중기 이후에는 4대 봉사가 일반화되기에 이른다. 상례(喪禮)에서 고조까지 상복을 입는 『가례』의 지침에 기반하여 제례에서도 고조까지의 4대를 제사 지내야 한다고 간주했던 것이다.
기제사의 설위(設位) 방식은 해당 조상만을 모시는지 아니면 배우자를 함께 모시는ㅈ에 따라 전자는 고비단설(考妣單設), 후자는 고비합설(考妣合設)이라고 한다. 『가례』를 보면 “아버지의 기일이라면 아버지 한 분의 신위만 설치한다. 어머니의 기일에는 어머니 한 분의 신위만 설치한다. 할아버지 이상과 방친의 기일도 모두 그러하다.”라고 되어 있으며, 『국조오례의』 역시 “기일에는 단지 제사일에 해당하는 한 분의 신위만을 정침에 모신다.”라고 기술되어 있다. 아울러 『사례편람(四禮便覽)』과 『가례집람』 등에도 단설로 제시되어 있다.
기일제는 ‘전일일재계(前一日齋戒)’, 곧 하루 전부터 재계(齋戒)에 들어간다. 재계는 제사를 지내기 위한 준비 기간으로, 산재(散齋)와 치재(致齋)가 있다. 산재는 기일 하루 전부터 주인과 주부를 비롯한 제사에 참가하는 사람들이 목욕을 하고, 옷을 갈아입고, 흉사(凶事/兇事)에 관여하지 않는 등 일상에서 절제된 생활을 한다. 치재는 내면적 마음에 대한 재계로, 제사를 모실 때 마치 조상이 앞에 계신 듯이 경건함을 갖추는 행위이다.
재계를 마치면 ‘설위(設位)’를 한다. 여기에서 ‘설위’는 제사를 거행할 정침(正寢)을 청소하고 제사상을 설치하여 신주(神主)를 안치할 자리를 마련해 두는 절차이다. 다음은 제구(祭具)를 진설하는 ‘진기(陳器)’와 제물을 장만하는 ‘구찬(具饌)’의 절차이다. 이들 모두 하루 전에 수행한다. 그런 뒤 이튿날 새벽에 ‘궐명숙흥설소과주찬(厥明夙興設蔬果酒饌)’, 즉 채소와 과실, 술 등을 진설하고, ‘질명주인이하변복(質明主人以下變服)’에 따라 제복을 입는다. 『가례』에 따르면 주인과 주부는 검푸른 계열의 옷을 착용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화려한 옷을 입지 않도록 하고 있다. 기일을 종신지상(終身之喪)이라고 했듯이 상복에 준하는 소박한 의복을 착용한다는 의미이다.
다음은 ‘예사당봉신주출취정침(詣祠堂奉神主出就正寢), 곧 사당에 가서 신주를 받들어 정침으로 모시는 절차이다. 즉 ‘설위’의 절차에서 마련해 둔 정침의 제사상으로 신주를 봉안하는 것이다. 그런 뒤 조상에게 예를 올리는 ‘참신(參神)’과 분향과 뇌주로 구성된 ‘강신(降神)’의 절차를 수행한다. 이어 ‘진찬(進饌)’의 절차에서는 밥, 국, 생선, 고기, 떡[米食], 만두나 국수[麵食] 등을 올린다. 그리고 ‘초헌(初獻)’에서는 술을 올린 뒤 ‘적간(炙肝)’이라고 해서 구운 간을 드리고, 독축(讀祝)을 진행한다. 축문은 ‘세서류역휘일복림추원감시호천망극(歲序流易諱日復臨追遠感時昊天罔極)’, 즉 ‘해가 바뀌어 돌아가신 날이 다시 왔습니다. 계절에 감응하여 추모하오니 그 은혜가 하늘처럼 광대하여 끝이 없습니다.’라는 내용이다. 부모 외의 조상에게는 ‘호천망극(昊天罔極)’ 대신에 ‘불승영모(不勝永慕, 사모하는 마음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라고 한다. 부모의 기일제에서는 주인 이하가 곡을 하면서 슬픔을 표하도록 되어 있다. 그리고 ‘아헌(亞獻)’에서는 주부가 술을 올린 뒤 ‘적육(炙肉)’을 드리며, ‘종헌(終獻)’은 주인의 형제 가운데 연장자 혹은 친척이나 손님이 수행하며 역시 ‘적육(炙肉)’을 올린다.
헌작의 절차가 끝나면 ‘유식(侑食)’을 수행한다. 주인이 주전자를 들고 제사상 앞으로 가서 술잔에 술을 가득 따르면 주부가 숟가락을 밥 가운데 꽂되 손잡이가 서쪽을 향하도록 한 뒤 젓가락을 바르게 정돈한다. 그리고는 문을 닫고 밖으로 나가서 기다리다가 축관이 ‘어흠’ 하고 세 번 기침을 하면 문을 열고 들어가는 ‘계문(啓門)’을 행한다. 합문의 절차에서 기다리는 시간은 『의례』에 “시동(尸童)이 일식구반(一食九飯)하는 것과 같다.”라고 되어 있다. 문을 열고 들어가서 주인과 주부가 차를 올리는 ‘봉다(奉茶)’의 절차를 수행한다. 다음은 주인 이하가 재배(再拜)를 하는 ‘사신(辭神)’의 절차로, 일종의 작별 인사인 셈이다.
사신을 행한 뒤 주인과 주부가 각기 신주를 받들어 사당에 다시 모시는 ‘납주(納主)’의 절차가 이어지고, 마지막으로 주부가 제사상의 술과 음식을 거둬들이는 ‘철(徹)’의 절차를 수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