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6년(태조 1)태조가 광흥사(廣興寺)·미륵사(彌勒寺) 등과 함께 창건하여 현성사(現聖寺)라 하고, 밀교종파인 신인종(神印宗)의 본산으로 삼았다.
의종 때 사찰의 명칭을 바꾸었으며, 1130년(인종 8) 4월에 문하시중 이공수(李公壽)가 양부의 대신과 회의하여 이 절에 재(齋)를 베풀고 국가를 위한 기도를 드리게 하였다. 특히, 명종과 고종은 자주 이 절에 들러 재를 올렸다. 1176년(명종 6) 5월명종이 친히 제석재(帝釋齋)를 열었고, 고종은 1217년(고종 4) 4월과 12월에 문두루도량(文豆婁道場)을 열었으며, 1229년 5월 기우제를 지냈다. 고종은 강화도로 천도하였던 기간을 제외하고는 매년 한두 차례씩 이 절에 행차하기를 잊지 않았다.
원종도 자주 이 절에 들러 국가의 안위를 기원하였는데, 1273년(원종 14) 5교 양종의 승려들을 모아 도량을 열고 남산궁(南山宮)이 적으로부터 평온을 되찾기를 기원하기도 하였다. 1275년(충렬왕 1)충렬왕이 공주와 더불어 이 절에 행차하여 원나라 황제의 축수를 기원하였고, 1278년 4월 이 절의 신궁(新宮)을 복원하도록 하였으며, 1295년 이 절에 행차하여 죄인들을 놓아주라는 명을 내리기도 하였다.
1297년 공주와 함께 이 절에 들러 궁중에 있는 쌀 100석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하사하도록 명하고 공주의 복을 기원하였다. 그 뒤에도 이 절에는 충숙왕과 공민왕의 행차가 있었다. 호국의 뜻을 간직한 밀교의 사찰이었던 이 절은 국가의 재난이 있을 때 왕이 자주 행차하였던 곳이다. 그러나 폐사연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다만, 『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것으로 보아 조선 중기까지는 존립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