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리변위도감(拶理辨違都監)은 1318년(충숙왕 5) 호세가(豪勢家)들이 불법으로 점유한 토지와 노비(奴婢)를 본래 주인에게 환원시키기 위하여 처음 설치된 것으로, 설치 목적이나 기능상 노비의 부적(簿籍)과 결송(決訟)을 관장하던 도관(都官)과 밀접한 관계가 있어 보인다.
1318년 5월 나라 안의 큰 폐단을 바로잡기 위하여 제폐사목소(除弊事目所)가 설치되었으나, 1개월 뒤 이를 찰리변위도감(拶理辨違都監)으로 고쳐 권세가(權勢家)들이 강점한 전민(田民)을 찾아 내어 본래 주인에게 돌려주는 일을 맡게 하였고, 무엇보다 ‘찰리’라는 명칭을 국왕이 직접 지었을 만큼 이 사업에 큰 관심을 기울였다. 하지만 6월에 권세가들의 반발로 충선왕(忠宣王)에 의하여 폐지되었다.
그 다음 달인 7월에 충숙왕(忠肅王)은 변위도감(辨違都監)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설치하지만 11월에 이 역시 충선왕의 간섭으로 폐지되었다.
그러다가 3년 뒤인 1321년(충숙왕 8)에 세 번째로 찰리변위도감(察理辨違都監)을 두는데, 이전 명칭의 ‘찰(拶)’자를 ‘찰(察)’자로 고쳤다. 이때에는 전년 12월에 충선왕이 토번(吐蕃)으로 유배를 가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 계기였을 것이다. 충숙왕은 당시 전민(田民)의 변정(辨正)을 단행하려 하였지만, 이번에는 몽골(원)의 명으로 4월에 입조하게 되면서 도감(都監)은 다시 혁파된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이 찰리변위도감의 잦은 치폐(置閉)는 곧 충선왕과 충숙왕 부자 사이의 정치적 갈등 때문이었다. 즉, 선왕인 충선왕은 왕위를 둘째 아들인 충숙왕에게 물려주고, 심양왕(瀋陽王)의 자리는 양자인 왕호(王暠)에게 양위(讓位)하였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고려 조정은 심왕당(瀋王黨)과 신왕당(新王黨)이 형성되어 나누어지면서, 정치적 대립이 심하였다. 더욱이, 충선왕은 연경(燕京)에 머물면서 고려의 내정을 간섭하는 것은 물론, 실질적인 왕의 권위를 행사하고 있었기 때문에 충숙왕과 불화가 컸다.
찰리변위도감의 설치는 고려 후기의 사회경제적 혼란을 개혁하려는 시도였다. 하지만 몽골(원)과의 관계 속에서 1318년의 찰리변위도감의 설치와 폐지, 1321년의 재설치 등은 바로 충선왕과 충숙왕 사이의 갈등을 직접적으로 보여 주는 사례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