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해 6월 찰리변위도감(察理辨違都監)으로 개칭하였다가 호세가들의 반발로 폐지하였다.
그러다가 1321년에 찰리변위도감으로 다시 설치되었는데, 이같이 치폐를 거듭한 것은 호세가들의 반발 외에 충선왕·충숙왕 부자 사이의 정치적 갈등과 정치세력간의 대립에도 연관이 있다고 보여진다.
즉, 1321년에 다시 설치된 것도 1320년 원의 연경(燕京)에서 고려의 정치에 간여하던 충선왕이 티베트[吐蕃]에 귀양가고 연경에 없는 틈을 타서 설치된 점을 고려하여 볼 때 이와같은 사정을 짐작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