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9년(충숙 복위 8) 윤8월 조적(曺頔)이 심왕 왕고(瀋王 王暠)를 옹립하기 위하여 꾸민 음모가 실패하자 이에 연루되어 순군(巡軍)에 감금되었다가, 11월 원나라의 중서성에서 보낸 단사관(斷事官) 두린(頭麟) 등에 의하여 왕, 폐신들과 함께 잡혀갔다.
1357년(공민 6) 3월 남경유수(南京留守)가 되었다. 1360년 7월 남경(南京)으로 천도하고자 하여 성궐(城闕)을 수리하게 하였는데, 전 한양윤(漢陽尹)으로 백성들을 혹독하게 일을 시켜 원성이 컸다. 1373년 12월 석기(釋器)의 사건 때 정보(鄭寶)와 함께 석기를 제주(濟州) 수정사(水精寺)에 보내어 안치시키라 하였는데, 그는 돌아와 석기가 배에 오를 때 스스로 몸을 던져 죽었다고 보고하였지만, 석기가 서북면도순문사(西北面都巡問使) 전녹생(田祿生)과 서해도도순문사 김유(金庾)에 의해 체포 처형되자, 그는 정보와 함께 참형에 처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