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창녕(昌寧). 1330년(충숙왕 17) 중랑장(中郎將)으로서 왕위를 부자가 서로 전해주는 법도에 대하여 힘써 진술하여 충숙왕과 충혜왕 부자간의 갈등을 해소하려고 노력하였다. 1331년(충혜왕 1) 원나라에서 추밀원사(樞密院使) 윤수곤(尹受困)과 중승(中丞) 궐간(厥干) 등을 보내어 태자 타구첩목이(妥懼帖睦爾)를 소환하였을 때 호군으로서 대청도(大靑島)에 나아가 그들을 맞이하였다.
충숙왕이 복위하자 대호군이 되어 대언(代言) 윤환(尹桓)과 함께 이전에 충혜왕이 가까이하던 악소배(惡少輩)를 제거할 것을 모의하고, 상호군 오자순(吳子淳), 대호군 홍서(洪瑞)의 도움으로 순군천호(巡軍千戶) 신청(申靑)에게 부탁하여 송팔랑(宋八郎)·홍장(洪莊) 등을 잡아 고문하게 하였다.
얼마 뒤 충혜왕이 다시 왕위에 오르자 도리어 제주안무사로 좌천되었다. 그 뒤 1343년(충혜왕 복위 4)에는 원나라에서 이운(李芸)·기철(奇轍)과 함께 중서성(中書省)에 글을 올려 왕의 탐음무도(貪淫無道)함을 극언하면서 고려에 성(省)을 세워 백성을 편안하게 해줄 것을 건의한 적이 있다.
1351년 공민왕이 즉위하면서 찬성사가 되고, 1352년에는 공민왕이 원나라에 있을 때 호종(扈從)한 공으로 연저수종공신(燕邸隨從功臣) 1등에 올랐으며, 이어 좌정승에 올라 하성부원군(夏城府院君)에 봉해지고 순성직절동덕찬화공신(純城直節同德贊化功臣)의 칭호를 받았다. 1376년(우왕 2) 공민왕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양평(襄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