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군(漕軍)이라고도 하였다. 조졸에는 사공과 격군(格軍 : 고려시대에는 梢工·水手)의 구분이 있는데, 사공은 선장에 해당하고 격군은 선원에 해당하였으며, 수운에 속한 조졸은 특히 수부라고 하였다.
이들의 본래 신분은 양인이었으나, 의무적으로 천역(賤役)에 종사하는 신량역천(身良役賤)의 계층으로서, 항상 ‘○○창 조졸’이라고 쓰여진 호패를 지니고 다녔다. 세습직으로서 다른 직역에 동원되지 않았다.
그 수는 시대에 따라 변동이 있었으나『경국대전』에 의하면 각 조창에 소속된 조졸 총수는 5,960인이며, 해운에는 각 조선에 사공 1인, 격군 15인, 수운에는 사공 1인, 격군 3인이 배속되었다.
그러나 초기에는 각 조선에 30인이 배속되어 1년씩 교대근무하였는데, 비번인 조졸은 신포(身布)를 납부하여 사공·격군의 급료 및 조운시 필요한 비용을 충당하였다.
조선 초기에는 선군(船軍)이 해상방어의 임무와 함께 조운작업을 맡고 있었는데, 이와 같은 겸무는 해방(海防)을 소홀하게 하여 성종 때 조운을 전담하는 조졸을 확보하기에 이르렀다.
이들이 맡은 역은 세곡의 조운뿐만 아니라 파선의 개조, 번염(燔鹽 : 구워서 정제한 소금)의 제조, 선척의 간수 등이다. 조운 도중 침몰·익사의 위험이 항상 따르고, 게다가 오랫 동안 해상에서 근무해야 하기 때문에 모두가 고역으로 여겨 역을 피하고자 하였으며, 이러한 현상은 16세기 이래로 더욱 두드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