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운선(漕運船)의 선장으로 추정된다. 고려 초기에 전국의 60포(浦)를 중심으로 각 지역의 호족(豪族)에 의하여 운송되던 세곡이 정종 때에 이르러 국가 주도의 조창제에 따라 조운되면서부터 출현하였다.
이들은 조창에 소속되어왔던 향리(鄕吏)의 지휘 아래 수수(水手) 및 잡인(雜人)과 함께 조창에서 경창(京倉)까지의 조운선 운행을 담당하고 있었는바, 세곡운송은 바로 그들의 신역(身役)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초공의 신역은 해상활동을 전제로 하는 것인만큼 생명의 위험을 수반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발선(發船) 기한이 지난 조운선을 운행하다가 파선하여 세곡이 없어질 경우에는 향리·수수와 더불어 이를 변상하여야 할 책임까지 진 고역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간혹 거짓으로 파선을 핑계대어 세곡을 착복하는 불법을 자행하기도 하였다. 한편, 이들은 충렬왕 때 고려와 원나라의 동정군(東征軍)에 수수와 함께 차출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