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어영 ()

조선시대사
제도
1633년(인조 11)에 경기 · 충청 · 황해도 등의 수군을 관할하기 위해 교동에 설립된 수군 최고 사령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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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1633년(인조 11)에 경기 · 충청 · 황해도 등의 수군을 관할하기 위해 교동에 설립된 수군 최고 사령부.
개설

17세기 초반 대외 정세의 변화로 북방의 위협이 가중되면서 강화도에 대한 방비가 강조되었다. 인조를 비롯한 반정세력들은 수군을 이용해 강화도를 방비하는 방안을 강구하였다. 이 가운데서 논의되는 것 중에 하나가 기존 화량진(花梁鎭)에 있던 경기 수영을 교동으로 옮기고 통어영으로 승격하는 조치였다. 이 조치로 인해 경기·황해·충청지역도 삼도 수군을 통괄하는 사령부가 생기게 되었다.

내용

17세기 초반 북방의 정세는 복잡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임진왜란을 계기로 성장한 건주여진은 중원 진출을 노리고 있었다. 광해군은 기미책을 활용하여 후금의 요구를 어느 정도 수용하고 회유함으로써 침략을 막고자 하였다. 하지만 광해군의 대청 정책에 반기를 들고 집권한 인조는 대청 강경책을 수립하고 대륙의 정세변화에 대응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강경책을 실행하는 데는 국방상의 대비도 중요하였다. 당시 전략적 요충지로 각광받고 있는 강화도를 방비하기 위한 여러 대책이 마련되었는데, 이 중 하나는 수군 강화책이었다.

본래 경기 수영은 경기 화량(花梁)에 위치하였다. 하지만 이 지역은 한양과 거리가 멀어 바람이 좋지 않은 경우 한강에 도달하는 시간이 길고 지리적 편벽성으로 인해 수군이 모이기 어렵다는 의견이 제기된 상태였다. 인조는 이 지역에 있던 수영을 강화도에 잠시 옮겼다가 교동으로 다시 이동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교동은 북방지역에서 강화도 위쪽을 거쳐 한강에 접어드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어 북방의 침입을 막기 위한 전략적 요충지였다.

조정에서는 교동으로 이동을 완료한 후에 경기 수영을 통어영으로 승격하고 경기 수사가 통어사(統禦使)를 겸임하게 하여 경기·황해·충청지역의 수군을 관할하게 하였다. 통어사는 통제사(統制使)와 직제가 약간 다르다. 통제사는 통제사가 본직이고 경상우수사가 겸직인데 비해 통어사는 경기수사가 본직이고 통어사가 겸직이다. 그러므로 통어사는 평소 때는 경기 수사로서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가 유사시 삼도 수군이 집결하는 경우에 통어사로서 기능한 것으로 보인다.

통어사가 설치되면서 충청도를 두고 통제사와 지휘권 다툼이 있었다. 인조는 북방의 위기에는 충청도를 통어사에게 소속시키고 일본군과의 문제가 생기면 통제영에게 편입시키는 방향으로 지휘제체 문제를 정리하였다. 이로 인해 통어사는 당시 수영이 없었던 황해·경기 수군은 직할하고 충청도 수군은 간접 관할하는 방식으로 지휘권을 행사한 것으로 생각된다.

변천과 현황

17세기 후반 중국에서 청의 지배가 공고해지면서 북방의 정세가 안정됨에 따라 청의 침입을 대비하기 위해 만들어졌던 통어영이 사실상 제 기능을 하기 어려워졌다. 그 결과 이 지역에서 통어영의 영향력은 점차 줄어든 것으로 보인다. 직할 구역의 하나였던 황해도에는 1719년(숙종 45) 수영이 설치되고 수사가 파견되면서, 통어영의 직접적인 지휘를 받지 않게 되었다. 또한 영종진(永宗鎭) 역시 방어영이 설치되고 통어영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지휘권을 가지게 되었다. 소속 수군진 역시 강화도의 방어 체제가 수군 중심에서 육군 중심으로 변화하면서 상당수가 폐지되었기 때문에 휘하 병력 역시 줄어들었다.

통어영의 진무영(鎭撫營) 합설 조치는 통어영의 위상 약화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조치이다. 이 조치로 진무사가 통어사를 겸임하게 하는 한편, 교동의 본래 통어영 본영을 방어영으로 격하시켜 진무영을 중심으로 교동과 영종이 좌·우방어영 체제가 형성되었다. 이 조치는 진무영을 중심으로 이 지역 방어 체제를 재편하고자 하는 정조의 전략이 담겨있지만, 여러 시행상의 문제점으로 인해 얼마 되지 않아 이전 체제로 복구되었다. 이후 병인양요 이후 강화도 방어 체제 문제가 다시 등장하면서 이 지역에 이를 주관할 아문으로 해방영(海防營)이 설치되면서 통어영은 폐지되었다.

의의와 평가

통어영은 통제영과 함께 삼도 수군을 관할하는 관청으로 설치되었기 때문에 이 지역 수군 방어 체제 변화에 있어 주요한 의미를 가진다. 또한 통어영의 위상 변화를 통해 당시 국가 보장처였던 강화도 방어 체제의 변화를 살펴볼 수 있다는 점에서 연구의 가치가 있다.

참고문헌

「17세기 수군방어체제의 재편」(송기중, 『조선시대사학보』53, 2010)
「17세기 강화도 방어체제의 확립과 진무영의 창설」(송양섭, 『한국사학보』13, 2002)
「18세기 강화도 수비체제의 강화」(이민웅, 『한국사론』34, 1995)
집필자
송양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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