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의 호적은 호수가 매 3년마다 호적단자(戶籍單子)를 작성하여 이임(里任)·면임(面任) 등의 확인을 거쳐 주군(州郡)에 제출하면 이를 참고로 하여 성적(成籍)하였다.
그런데 그 기재사항으로 주소, 호수와 처의 성명, 직업·생년·본관·내외사조(內外四祖:증조·조부·부·외조)와 솔거자녀의 이름·생년뿐만 아니라 노비와 고공(雇工)의 이름·생년까지 호수가 기재하였으므로 실제로 호의 개념은 자연적인 개별가호(個別家戶)와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조선 초기에는 장정들의 숫자와는 상관없이 군역을 호단위로 부담하였다. 그런데 이 허점을 이용하여 특히 경상·전라·충청도와 함경도 6진(鎭) 지방의 토호(土豪)들은 자가(自家)를 중심으로 넓게 울타리를 치고 그 속에 여러 개의 가사(家舍)를 따로 짓고는 국가로부터 도망한 자, 또는 토호 스스로 은점(隱占:몰래 점령함.)한 별개의 세대를 안주시키고는 1호의 군역만을 행하는 규피(規避:규정을 회피함.)행위가 자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즉, 역(役)과 공부(貢賦)를 피하기 위하여 단한(單寒)한 개별 가호가 협호(挾戶:따로 떨어져 있는 집채)의 형태로 잠복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호적을 토대로 작성한 군적(軍籍)에 따라 군역을 부담하는 양인(良人)인 경우 초기에는 자연호(自然戶)를 단위로 하나의 호수는 정군(正軍)이 되고, 그 밖의 여정(餘丁)은 보인(保人:봉족)이 되어 호수의 복무기간 중 경비부담을 하는 것으로 역을 대신하였다.
그러나 1464년(세조 10)의 보법(保法)은 자연호를 무시하고 인위적으로 편성, 각 병종(兵種)마다 달리 보인을 지급하였다. 그 후부터는 호수라 하면 호적법상의 호수와는 달리 군역제와 관련하여 정군을 호칭하는 것이 일반적인 관례가 되었다. 세조 때 보법으로의 개편은 국역편성의 기준을 호단위에서 인정(人丁) 단위로 개혁한 것이었다.
그런데 군액(軍額)을 분정(分定)할 때 한 가호를 1보로 하는 단위의 원칙은 말단관리와 결탁한 부호(富戶)에게만 지켜지고 대부분의 빈한한 가호는 정군호에 대한 보호(保戶)로 편성되었다. 그리하여 차츰 호수와 보인의 관계는 수탈관계로 발전하게 되었다.
즉, 1호의 경우 타인을 봉족(솔정(率丁) 또는 조정(助丁)이라고도 함)으로 삼고, 자신의 자제는 다른 호수의 봉족이 되는가 하면, 심지어 서촌인(西村人)이 동촌인(東村人)의 봉족으로, 동촌인을 서촌인의 봉족으로 삼는 모순이 허다하였다.
또 2정 1보의 원칙에 따라 3정이 있는 빈호의 경우 2명이 동일보를 구성하고 남는 1명은 다른 보의 구성원이 되어야 했으므로 1자연가호에 2개의 상이한 부담이 지워지게 되었다. 실제 빈민으로 충급된 봉족은 호수에게 과다하게 보포를 수탈당하였으며, 경제외적 주종관계까지 강요당하였다.
즉 호수는 봉족을 노비처럼 부리는 경우도 있었고, 호수 대신 실역(實役)을 지는 경우도 있어 고통을 견디지 못한 봉족들의 유망사태가 나타나게 되었다. 이러한 모순들을 시정하기 위한 조치가 1541년(중종 36)부터 실시한 군적수포제(軍籍收布制)로서 이후부터 군역은 군포제로 운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