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 당성 ( )

화성 당성
화성 당성
건축
유적
국가유산
경기도 화성시 서신면에 있는 삼국시대 복합식 성곽. 산성.
이칭
이칭
당항성(黨項城), 당항성(党項城)
국가문화유산
지정 명칭
화성 당성(華城 唐城)
분류
유적건조물/정치국방/성/성곽
지정기관
국가유산청
종목
사적(1971년 04월 15일 지정)
소재지
경기 화성시 서신면 상안리 산32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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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경기도 화성시 서신면에 있는 삼국시대 복합식 성곽. 산성.
개설

당성은 화성시 서신면 상안리에 있는 해발 165m의 구봉산 정상부를 중심으로 위치하였고, 시대를 달리하는 테뫼식과 포곡식이 결합되어 축성된 복합식산성이다. 당성은 역사적으로 ‘당항성(黨項城)’ 또는 ‘당항성(党項城)’으로 비정되고 있다. 성벽은 구봉산의 정상부와 계곡 쪽으로 방형에 가까운 형태로 축조되었으며, 둘레는 1,200m이고 면적은 157,689㎡이다. 1971년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역사적 변천

당항성은 본래 백제 지역이었는데, 475년에 고구려 장수왕이 백제의 한성(漢城)을 점령하면서 당성군(唐城郡)이라고 하였다. 551년에 신라 진흥왕이 한강유역을 점령하여 이곳을 차지한 이후 통일신라시대인 757년에 당은군(唐恩郡)으로 개칭하였으며, 829년에는 군사적인 거점으로서 당성진(唐城鎭)이 설치되었다.

내용

당성은 1993년에 지표조사가 실시되었으며, 이것을 바탕으로 1998년과 2000년에 2차에 걸쳐서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당성의 성벽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지기 전에는 본성(本城)과 제1외성(外城), 제2외성으로 이루어진 복합식산성으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발굴조사 결과 당성은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에 축조한 것이 확인되면서 시대를 달리하였던 것으로 판명되었다.

성벽은 다양한 방식으로 축조되었음이 확인되는데, 동쪽의 성벽은 거의 붕괴되어 외벽의 높이 및 축조방식을 파악하기 어렵다. 북쪽의 성벽은 토성구간으로 확인되었는데, 성벽의 기저부의 폭은 6.6m이며, 잔존하는 최고 높이는 3m이다. 성벽의 중앙은 판축구간이며 그 기저부에는 석재들이 높이차를 두며 깔려 있다.

망해루지(望海樓址)를 감싸고도는 곡성(曲城) 부분에서 당성의 성벽 중에서 가장 이른 시기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는 성벽이 확인되었다. 당성의 외성지는 제 1․2외성지 2개가 존재하며 본성에 포함된 자성(子城)으로 남양장성(南陽長城)의 일부로 추정되어 왔다. 그러나 조사결과 15m 정도 성벽이 노출되었는데, 이 중에서 6m 정도는 기단석을 포함하여 7∼8단 정도의 성벽이 잔존하고 있으며, 그 외의 구간은 기단석만 남아 있는 상태이다. 북문지는 잔존 길이 8.40m, 폭 2.6m이며, 문지 바닥 양 벽면에서 문지공석(門址孔石)이 확인되었다.

성벽의 조사결과 외성지로 알려진 성을 중심으로 망해루지를 포함하여 둘레 400∼500m의 테뫼식 석축성벽이 먼저 축조되었으며, 이후 현재 본성으로 알려진 토석혼축의 성으로 확장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성의 확장 시기는 당성이 이 지역의 중심지역으로 기능이 강화될 때부터로 보이며, 출토되는 유물의 양상으로 미루어 통일신라시대로 추정된다.

건물지는 성내의 가장 넓은 평탄대지에서 방형의 유구를 비롯한 온돌구조와 배수시설 등 8개소의 유구가 조사되었지만, 유구들이 훼손되어 정확한 구조를 알 수 없다.

특징

당성 주변에는 많은 관방유적이 위치하고 있어 당성을 중심으로 하는 서해 해상교통로의 중요성을 반영하고 있다. 즉 마도면 백곡리에는 백곡리토성(白谷里土城)이 있고, 서신면 광평리 성밖마을의 북쪽 구릉에서부터 남양동까지에는 남양장성이 있다. 그리고 남양반도 내에는 청명산성(淸明山城)·용두리성(龍頭里城)·화양진성(華梁鎭城) 등이 위치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당성은 서해상의 여러 섬들을 관찰할 수 있고 남으로는 태안반도의 산맥이 조망되는 중요한 군사적인 요충지이다. 특히 삼국시대에는 중국과의 교섭이 이루어지는 출발점이었기 때문에 그 중요성이 더욱 크다. 551년에 신라는 이 지역을 확보하여 중국과의 직접적인 교섭을 실시함으로써 이후 삼국통일을 이룩할 수 있는 중요한 기반을 마련하였다.

통일신라시대에도 많은 사신과 승려들이 당성을 통하여 중국에 왕래하며 활발한 교류활동을 전개하였고, 중국으로부터 불교와 유교 등의 발달한 문화가 신라에 전래되면서 사상적․문화적으로 많은 영향을 받았다. 따라서 당성은 인적·물적인 교류를 바탕으로 중국의 발달한 문화가 한반도로 들어오는 첫 번째 창구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참고문헌

『삼국사기(三國史記)』
『동아시아 실크로드와 당성』(화성시·신라사학회, 2017)
『당성과 황해의 문화: 해양문화 교류의 중심지』(배기동 외, 한양대학교 문화재연구소, 2012)
『한국고고학전문사전: 성곽·봉수편』(국립문화재연구소, 2011)
『당성』(경기문화재단, 2009)
『당성: 2차 발굴조사보고서』(화성군·한양대학교 박물관, 2001)
『당성: 1차 발굴조사보고서』(화성군·한양대학교 박물관, 1998)
『당성지표조사보고서』(화성군, 1993)
관련 미디어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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