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국산성은 남해 대국산(大局山: 370m)에 있는 삼국시대 신라 석축 산성이다. 대국산 정상부에서 능선을 따라 먼저 쌓아 올려진 석축성과 동쪽 비탈면으로 석축성에 덧대어 산 중턱까지 연결하여 쌓은 토성으로 구성되어 있다. 석축 산성은 가늘고 긴 성돌로 바른층 쌓기를 하였으며, 보축 성벽과 현문식 문지를 갖추고 있는 전형적인 신라 석축 산성이다. 토성은 기단식 판축 토성으로 덧붙여 쌓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곳은 신라 전야산군의 치소성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고성과 사천 지역뿐만 아니라 남해 도서 지역이 넓게 조망되는 요충지이다.
1995년에 지표 조사를 실시하여 건물지(建物址)와 연지(蓮池), 현문(懸門)식의 문지(門址) 등이 확인되었다. 대국산성의 초축 시기는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으로 보이며 신라 전야산군의 치소(治所)성으로 추정되었다. 전야산군은 690년( 신문왕 10)에 남해에 설치한 군으로, 757년(경덕왕 16) 남해군으로 개칭되었다.
이후 2002년과 2003년에 정비 및 복원을 위하여 대국산성의 연지와 추정 남문지에 대한 발굴 조사를 실시하였다. 발굴 조사 결과, 대국산성은 석축으로 쌓은 내성과 토성으로 쌓은 외성의 2중성으로 확인되었다. 석축성인 내성의 둘레는 530m, 외성의 둘레는 730m이다. 석축성인 내성은 편암계의 석재를 긴 사각형 모양으로 가공하여 켜 쌓기로 쌓았다. 내벽은 외벽에 비하여 가공되지는 않았지만, 내벽도 석축으로 구축하였다. 적심부는 전체를 돌로 채운 협축(夾築)식 성이다. 지대석(址臺石)은 사용되지 않았으며, 수직 쌓기를 하여 외벽의 경사도는 수직에 가깝다. 성벽의 몸체 부분의 너비는 6m 정도이며 단면은 사다리꼴이다. 내벽부는 일정한 높이까지 되메우기를 하였으며, 외벽 기저부에는 보축 성벽이 확인된다.
외성인 토성은 내성의 남동벽에서 시작되어 산복보를 감싸고돌아 북쪽 회절부에 연결하여 쌓았다. 토성은 기저부의 양쪽에 일정한 높이까지 기단 석축을 하고, 판축 공법으로 구축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다른 한쪽 기단석열은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판축 토성을 구축하기 위한 영정주의 간격은 330cm 정도로 추정되고 있다. 조사단에서는 내성과 외성을 동시에 쌓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기단식 판축 토성의 등장 시점이나 외성을 토성으로 덧붙여 쌓아 성 내부를 확장하는 영월 계족산성, 화성 당성, 김포 수안산성 등의 사례와 축조 시점을 고려하면 토성의 축성 시기는 9세기 중엽 이후일 것으로 판단된다.
문지는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야 하는 현문식 성문으로 구축되었다. 내성 중앙부에서 연지가 조사되었다. 연지는 직경 11.5m인 원형이고 깊이는 2.5m이며, 아래로 내려가면서 계단상으로 좁혀서 3단으로 쌓았다. 바닥도 판석으로 깔았으며, 축을 쌓기 전 황색의 점토를 두껍게 다져 물이 새어 나가지 못하도록 하였다. 연지 측벽의 석재와 석축 성벽의 석재가 동일한 것으로 보아, 연지는 초축 시기에 함께 쌓은 것으로 추정된다.
출토물은 대부완과 단각 고배류 등 6세기 말에서 7세기 대의 유물이 주류를 이룬다. 조사단은 이러한 근거를 바탕으로 대국산성의 초축 시기를 7세기 전반으로 추정하였다.
남해 대국산성은 후에 남해군으로 개칭되는 전야산군의 치소성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러나 조선시대 군현의 중심지에서 4km를 벗어나지 않는 곳에 있었는데 반해 대국산성은 남해군의 지소에서 북으로 7km 정도 떨어진 지점인 다소 먼 거리에 있어 향후 검토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