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7년 배산성지(盃山城址)에 대한 지표 조사를 시작으로 배산성에 대한 학술 조사를 실시했다. 지표 조사 결과 배산성은 배산의 두 봉우리를 중심으로 산의 9부 능선을 두르고 있던 토성이었을 것으로 추정되었다. 또한 210m 규모의 내성과 8부 능선을 감싼 300m 규모의 외성으로 이루어진 이중성(二重城)이었을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2009년 정밀 측량 조사 결과 성의 둘레가 1,170m에 달했음을 알 수 있었는데, 이는 성의 규모가 기존에 알려졌던 것보다 컸음을 말해 준다. 본성의 동쪽과 북쪽에는 문이 있던 터가 있으며, 성의 내부에는 건물터 4기와 집수지 1기가 있었다.
2016년에 실시된 시굴 조사에서는 서 · 남 · 북쪽 일대에서 돌로 쌓은 흔적을 찾았으며, 새로운 건물터 1기와 집수지 1기를 확인하였다.
2017년 1차 발굴 조사를 통해 영남 지역에서 제일 큰 ‘호안석축(護岸石築)으로 이루어진 평면 원형 집수지’ 1기를 확인하였다. 1호 집수지는 직경 최대 9.2m, 2호 집수지는 13m이며, 두 집수지 모두 3단으로 이루어진 계단식 형태를 하고 있다. 집수지의 바닥과 외벽 내부는 점토다짐 기법으로 방수 처리를 하였다. 또한 성벽의 몸체에 사용한 안산암을 집수지의 바닥에 일렬로 쭉 이어지도록 가공하여 가지런히 쌓았다. 1호는 바닥에 판석을 깔았으며, 2호는 바닥에 점토다짐을 하었다. 집수지 내에서는 기와를 비롯하여 생활용 토기, 목기 등이 다량으로 출토되었다. 기와는 제작 기법으로 미루어 볼 때, 6세기 후반 이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2호 집수지에서는 「을해년(乙亥年)명 목간」이 출토되었다.
2018년 2차 발굴 조사에서는 삼국시대부터 통일신라시대에 걸쳐 만들어진 성의 몸체와 대형 건물터 1동 등을 확인하였다.
2019년에는 2차 조사에서 확인하지 못했던 성의 몸체 내부에 대한 조사를 실시하였다. 조사 결과, 처음 만든 체성벽(體城壁, 성벽의 몸체 부분)은 바닥을 계단식으로 고르게 다진 후, 지대석(址臺石) 없이 안산암 석재를 직사각형으로 가공하여 바른층쌓기 기법으로 쌓았다. 외벽 바닥은 삼각형의 단면을 덧붙인 것을 확인하였다. 성의 몸체는 보수한 흔적이 보이며, 보수된 성벽은 지대석을 놓고 가공된 화강암을 퇴물림쌓기 기법으로 쌓았다.
배산성은 성을 쌓은 기법과 성내에서 출토된 유물, 방사성 탄소 연대, 간지명 목간 등을 근거로 6세기 중엽에서 7세기 중엽 사이에 건축된 신라성으로 추정한다.
배산성이 있는 동래 지역은 757년(경덕왕 16)에 신라 거칠산군(居漆山郡)에서 동래군(東萊郡)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동래군의 영현(領縣)은 동평현(東平縣)이었다. 지금까지는 배산성의 남동쪽에 있는 동래고읍성을 동래군의 치소성(治所城)으로 추정해 왔다. 그러나 동래고읍성의 건축 형태인 기단식 판축 토성은 9세기 이후에야 등장한 것이기 때문에 이 성이 통일신라의 치소성일 가능성은 희박하다. 배산성의 북쪽 경사면에는 연산동 고분군이 있는데, 이 고분군은 배산성과 관련이 있었을 것으로 본다. 삼국시대에는 산성이 그 지역의 행정 사무를 맡아보는 치소(治所)의 역할을 했기 때문에, 배산성이 거칠산군의 치소성일 가능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