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 행주산성 ( )

고양 행주산성 전경
고양 행주산성 전경
건축
유적
국가유산
임진왜란 당시 행주대첩으로 널리 알려진 삼국시대와 조선시대에 축조된 토성과 석성이 있는 산성.
이칭
이칭
행주산성
유적
건립 시기
삼국시대, 조선시대
관련 국가
백제, 조선
관련 인물
권율
둘레
1km
면적
354,732㎡
소재지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행주내동 산26번지
국가지정문화재
지정 명칭
지정기관
국가유산청
종목
국가유산청 사적(1963년 01월 21일 지정)
소재지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행주내동 산26번지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고양 행주산성은 조선시대 임진왜란 당시 3대 대첩 중 하나인 행주대첩이 일어난 곳이다. 권율 장군을 비롯한 의병과 승병 2천 3백여 명이 왜군 3만여 명과 맞서 싸워 승리를 이끌었던 역사적 현장으로, 당시 전투에서 아낙네들이 긴치마(행주치마)를 이용해 돌을 옮겨 싸움을 거들었다는 일화로도 잘 알려져 있다. 과거에는 7~8세기에 축조된 토성으로만 알려져 있었으나, 최근 발굴 조사에서는 7세기 전중반에 석축 성벽이 축조된 이후 12~13세기경 토성이 축조되었고, 다시 고려 말, 조선 초에 석축 성벽이 조성되었음이 확인되었다.

정의
임진왜란 당시 행주대첩으로 널리 알려진 삼국시대와 조선시대에 축조된 토성과 석성이 있는 산성.
발굴 경위 및 결과

고양 행주산성은 임진왜란 당시 3대 대첩 중 하나인 행주대첩이 일어났던 곳으로 1963년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1991년 서울대학교 박물관에서 산성의 정비 복원을 위해 토성지에 대한 시굴 조사를 실시한 것이 첫 번째 학술 조사였다. 2000년에는 행주산성과 주변 지역 개발을 위한 종합 정비 계획을 수립하는 과정에서 세종대학교 박물관이 학술 지표 조사를 실시하였다. 그 이후에 별다른 발굴 조사가 없다가 2016년에 다시 행주산성의 시간적 흐름에 따른 변화 과정과 역사성을 밝히기 위한 보완 종합 정비 계획을 수립하기 위해 불교문화재연구소에서 지표 조사를 실시한 후, 2017년에 시굴 조사를 실시하여 초축 당시의 석축 성벽을 확인하였다. 2019년에는 새롭게 확인된 성벽의 범위를 확인하기 위해 한양문화재연구원에서 시굴 및 발굴 조사를 실시한 바 있다. 그 결과 고양 행주산성은 7세기 대 전중반에 축조된 석축 성벽과 이후 개축된 토축 성벽, 그리고 고려조선 초에 다시 개축된 석축 성벽 등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여러 차례 개축이 있었음이 확인되었다.

건립 경위

2019년도 발굴 조사 결과에 따르면, 고양 행주산성은 7세기 전반에서 중반에 이르는 시기에 덕양산 정상과 8~9부 능선을 두르는 테뫼식 석축 산성으로 처음 조성되었다.

변천

2019년도 발굴 조사 결과에 따르면, 7세기 전중반에 1차 석축 성벽이 건설된 이후, 7세기 후반에서 8세기 전반에 치 1기가 추가되었고, 8세기 중반에서 9세기 전반에는 보축 성벽과 함께 다시 치 1기가 추가되었다. 이후 계단식으로 석축이 이루어졌으며, 2차 석축 성벽과 치가 추가되는 등의 수축이 있었다. 이후 12세기에서 13세기에는 석축 산성의 북쪽과 서쪽으로 토성이 축조되며 산성의 확장이 있었고, 다시 치가 추가되었다. 이후 토성벽의 수축이 있었다. 고려 말 조선 초에는 토성이 폐기되고 다시 3차 석축 성벽이 축조되는 등 삼국 통일기부터 고려 및 조선시대까지 복잡한 수 · 개축이 있었음이 확인된다.

형태와 특징

고양 행주산성은 덕양산 정상을 중심으로 해발 70∼100m에 이르는 능선을 따라 축조된 둘레 430m 가량의 테뫼식 석축 산성을 기본으로 한다. 다만 토성이 석축 산성의 북쪽과 서쪽으로 존재하고 있어서, 테뫼식 산성인 내성과 북쪽으로 전개된 작은 골짜기를 에워싼 외성의 이중성으로 보기도 한다. 임진왜란 당시의 상황을 전하고 있는 『선조실록(宣祖實錄)』에 따르면, 전라도 관찰사순찰사 권율이 행주에서 왜적을 대파하였는데, 녹각(목책)을 설치한 뒤 토석성(土石城)을 쌓아 왜적을 물리쳤다고 한다. 고양 행주산성에서 확인되는 토축 성벽은 당초 통일신라시대에 축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2019년도 발굴 조사 당시 기단 석축 내부의 기조부 조성층 하부에서 고려시대 전중기에 해당하는 기와편이 출토되어, 고려 중기에 축조되었음이 새롭게 밝혀졌다. 즉, 고양 행주산성은 기단 석축형 판축 토성으로, 석성에서 토성으로 개축된 특이한 사례이다.

고양 행주산성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테뫼식 석축 산성에 토성이 부가된 형태로 다소 복잡한 구조를 띠고 있는데, 아직까지 산성 전체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은 관계로 토성 구간에 대한 전체 양상은 밝혀지지 않은 상태이다. 출토 유물로는 토기와 자기, 기와와 철기 등이 있다. 토기는 대체로 7세기에서 통일신라시대에 해당하는 것으로, 뚜껑과 완(盌), 대부완(臺附盌), 호, 벼루 등이 확인되었다. 기와는 격자문과 선조문이 타날된 평기와와 쌍조문이 있는 막새도 확인되었다.

의의 및 평가

사적으로 지정된 고양 행주산성은 서해에서 한강을 따라 서울로 진입하기 위해서 반드시 거쳐야 하는 관문으로, 신라가 한강 유역을 차지한 이후 만들어져 조선시대까지 사용된 중요한 관방유적이다. 최근에는 발굴 조사를 통해 7세기 중반에 석성으로 처음 만들어졌다가 고려시대에 토성으로 확장 개축되었고, 다시 고려 말~조선 초에 석성으로 개축되었음이 밝혀졌다. 고양 행주산성은 특히 조선 임진왜란 당시 권율 장군을 필두로 한 의병과 승병이 힘을 합쳐 왜군 3만여 명을 무찌른 행주대첩이 있었던 만큼 그 역사적 의미가 크다. 다만 토성에 대한 정확한 양상이 확인되지 않아 이에 대한 추가 조사가 필요하다.

참고문헌

원전

『新增東國輿地勝覽(신증동국여지승람)』
『大東地志(대동지지)』
『宣祖實錄(선조실록)』
『仁祖實錄(인조실록)』

단행본

『행주산성 시굴조사보고서』(서울대학교 박물관, 1991)
『고양 행주산성 정비사업부지 내 유적 시굴조사』(불교문화재연구소, 2019)
『고양 행주산성』(한양문화재연구원, 2021)
집필자
양시은(충북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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