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민회 · 대한신민회, 또는 신민단으로도 불렸다. 단장 김규면(金圭冕), 부단장 한광택(韓光澤), 총무부장 최상진(崔相鎭), 재무부장 이존수(李存洙), 외무부장 김덕보(金德甫) 등이 선임되었다.
3 · 1독립선언이 선포되자, 이들은 국내 진공을 위한 독립전쟁 준비와 문화운동을 효과적으로 전개하고자 조직 확대를 꾀하였다. 그 뒤 만주 · 노령 · 한국에 40여 개의 지구조직 및 2만여 명의 단원을 확보하였다. 단원들에게 교육활동을 통해 애국심을 고취하며, 농민운동과 식산조합을 만들어 공부할 길을 열어 주었다.
한편, 독립군으로 2개의 지부를 신설해 왕청현지부(汪淸縣支部)에 단장 김준근(金準根) 사령관 겸 참모장으로 박승길(朴昇吉), 혼춘현지부(琿春縣支部)에 사령관 한경세(韓景世)를 임명하였다. 병력 증강을 위해 함경북도 · 간도 · 러시아령 등지에서 모은 군자금으로 장총과 권총 및 탄약을 구입해 500여 명의 독립군을 무장시켰다.
이 단은 북간도 무력독립운동 8개 단체의 하나로서 1920년 10월 20일 250명의 병력을 제1연대장 홍범도(洪範圖) 예하의 군으로 통합해 완루구 · 어랑촌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다. 그 뒤 12월 밀산(密山)에서 개최된 대한독립군단 결성을 위한 집회에 대한신민회의 대표로 김성배(金聖培)를 파견했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혼춘사건이 일어나고 이어서 일제의 무자비한 독립군 소탕전이 전개되자, 혼춘지부는 왕청지부와 함께 노령으로 망명, 이주하였다. 그 뒤 군사훈련과 독립사상 고취를 위해 활약하던 중, 1922년 12월 레닌정부로부터 해체령 및 무장해제령을 통고받았다.
이에 한경세 · 문성룡(文成龍)의 재소파(在蘇派)와 김규식(金奎植)의 만주파로 분열되었으며, 소련에 대한 보복으로서 김규식이 소련군 3명을 살상하였다. 이 사건으로 한경세와 문성룡은 체포, 투옥되어 재소파단체는 해체되었다. 그리고 김규식일파는 만주로 탈출해 독립운동의 재개를 꾀했으나 곧 해체되었다.
기회를 포착해 국내진공을 꾀하려던 꿈은 좌절되었으나, 실력양성과 독립정신 고취를 통한 민족역량의 성숙에 기여, 지속적인 독립운동이 가능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