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李鏞)은 함경남도 북청에서 헤이그 밀사였던 이준(李儁)의 아들로 태어났다. 국권피탈 후 중국으로 망명하였고, 절강군관학교(浙江軍官學校)를 졸업한 뒤 중국군 장교로 임관하였다.
1919년 4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개최된 한인사회당 제2차 대회에서는 중앙위원으로 선임되어 군사부를 담당하였다. 1920년 5월 대한민국임시정부로부터 동로(東路) 사령관에 임명되어, 북간도 명월구(明月溝)에 사관학교 설립을 준비하였다. 그러나 일본군의 간도 출병으로 인해 소련으로 이동하였다. 1921년 6월 스바보드니(Svobodny)에서 발생한 자유시참변 과정에서 잡혔고, 이르쿠츠크로 압송되던 중 그해 7월에 탈출하였다.
그 뒤 연해주로 돌아와서 대한의용군사회(大韓義勇軍事會)를 재조직하고 사령관이 되었다. 그해 11월부터 1922년 2월까지 이만(Iman), 하바롭스크 등지에서 백위군과 전투를 전개하였다. 그해 10월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과 상하이파 고려공산당의 통합을 위해 베르흐네우딘스크(지금의 울란우데)에서 개최된 고려공산당 연합대회에 참석하였다.
1925년 소련 군사고문단과 함께 중국 광둥〔廣東〕혁명 근거지로 이동하여 국민혁명군 포병연대에서 근무하였다. 1927년 4월 장제스〔蔣介石〕의 반공 쿠테타에 대항하였고, 그해 12월 광저우 봉기〔廣州起義〕에 군사고문으로 참여하였다. 봉기 실패 후 해륙풍 근거지 건설에 참여하였다.
1930년 만주로 가서 조선공산당재건설준비위원회에 참여하여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을 전개하였다. 그해 10월부터 1931년 9월까지 중국공산당 동만특위 연락부장을 지냈다. 같은 해 1월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8 · 15광복 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권에 참여하여 초대 도시경영상과 사법상 등을 역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