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쪽과 남쪽은 동해, 서쪽은 경성군 경성면, 북쪽은 부령군 청암면과 접하고 있다. 동경 129°39′∼129°52′, 북위 41°40′∼41°50′에 위치하며, 면적 275㎢, 인구 23만4388명(1945년 현재)이다.
신암1가(新巖一街)·신암2가·신암3가·신암4가·송도(松島)·일출(日出)·영(榮)·서(曙)·교립(橋立)·고사(高沙)·파(巴)·수(壽)·행(幸)·축(祝)·조일(朝日)·목하전(目賀田)·상반(常盤)·상생(相生)·길천(吉川)·부도(敷島)·대화(大和)·명치(明治)·보(寶)·입선(入船)·미생(彌生)·부귀(富貴)·복천(福泉)·북성(北星)·항(港)·천마(天馬)·포항(浦項)·어항(漁港)·동송향(東松鄕)·동수남(東水南)·동월포(東月浦)·동자작(東自作)·반죽(班竹)·창평(蒼坪)·직하(稷下)·서자작(西自作)·수성(輸城)·송(松)·근(芹)·서월포(西月浦)·서송향(西松鄕)·회암(回巖)·남석(南夕)·송정(松亭)·용향(龍鄕)·강덕(康德)·농포(農圃)·봉암(鳳巖)·나북(羅北)·나남본(羅南本)·생구(生駒)·미길(美吉)·초뢰(初瀨)·수북(水北)·수남(水南)·용암(龍巖) 등 60개 동으로 되어 있으며, 시청 소재지는 신암1가동이다.
이 시는 동쪽으로 쌍연산(雙燕山, 196m)·고말산(高秣山, 183m)에서 뻗은 고말반도(高秣半島)가 가로막고 있고, 서쪽으로는 천마산(天馬山, 102m)이 솟아 서북쪽으로 가로막아 주며, 북쪽으로는 낙타산(駱駝山) 등의 산이 있다. 청진항은 만형(灣形)을 이루고 있는 고말반도의 허리 부분의 낮은 데를 깎아 그 서부에 발전하였다.
고말산은 암석이 대부분이지만 그 표토에 나무가 우거져 있으며 남쪽에 등대가 있다. 항내는 넓고 수심이 30m 깊이에 간만의 차가 적은 양항이지만, 서남쪽이 지나치게 개방되어 밀려드는 파도를 막지 못하므로 전면에 방파제를 축조하였다.
서쪽으로는 나남에 이르는 광대한 수성평야(輸城平野)가 펼쳐져 있으며, 평야의 동쪽으로 수성천이 흐르고 있다. 바다의 영향으로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큰 추위가 없는 편이다. 연평균 기온 6∼8℃, 1월 평균 기온 -5.3℃, 8월 평균 기온 14.9℃, 연 강수량 567.1㎜이다.
[고 대]
두만강 하류 연안에서 구석기 시대의 동물 화석과 세석기·골각기 등의 유물과 유적지가 발견되었고, 인접한 여러 곳과 관내 농포동 신석기 시대의 패총에서 타제석기·마제석기·골각기·즐문토기·방추차 등이 출토된 것으로 미루어 구석기 시대부터 이 지방에 사람이 살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기》에 의하면, 이 지방은 숙신(肅愼)·읍루(揖婁)·예맥(濊貊)·옥저(沃沮)·말갈(靺鞨)·부여(夫餘) 등의 부족국가가 있었던 곳이며, 삼국 시대에는 고구려 판도였다. 668년(문무왕 8) 고구려가 망하고 그 땅에 당나라 군정이 실시된 무렵에는 한때 그 치하에 있었으며, 699년(효소왕 8) 발해의 동경용원부(東京龍原府)에 속하였다.
[고 려]
발해가 거란에 의하여 망하면서 이 지방은 그 영역에 속하였으며 이후 금(金)·원(元)의 지배 아래 있었다. 고려 말엽 지금의 함경남도 갑산에서 두만강 하구에 이르는 선까지 여진의 세력 범위에 들어갔으며, 당시 이 고장은 삭방도(朔方道) 또는 동북면(東北面)의 우롱이(亏籠耳), 즉 지금의 경성군 관하에 속해 있었다.
[조 선]
1398년(태조 7) 동북면 도선무순찰사(都宣撫巡察使) 정도전(鄭道傳)이 북도 군·현의 행정구역을 책정할 때 우롱이가 경성(鏡城)으로 고쳐졌고, 이곳은 그 관하 석막(石幕 : 지금의 부령군)의 땅이었다.
1410년(태종 10) 두만강 하구의 경원부(慶源府)가 여진의 침략으로 한때 경성부에 병치되었다가 1417년 부(府)를 부가참(富家站 : 지금의 부거)에 옮겨 경원도호부로 부활된 뒤 그 관하에 들어갔다.
1438년(세종 20)부거현에 속하였으며, 그 뒤 육진 개척에 의하여 부령부(富寧府)가 생겼을 때는 그 산하 청하면에 소속된 60여 호에 불과한 어촌이었다.
[근 대]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이곳은 병력과 군수물자의 출입항으로 차츰 발전하여 1908년 만국통상항으로 개항되었다. 1913년 종래의 부령군 일원을 통합하여 청진부로 승격시켰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시 부령군은 복귀되었고 청진부는 당시 청하면 청진동과 신암동만 관할하다가 차츰 부령군 청암면의 일부 동리까지 이에 편입시켜 구역을 확장하였다.
그 뒤 함경선과 청회선 철도의 개통에 따라 간도 방면의 물자 수출입항으로 각광을 받게 되어 1921년부터는 대대적인 축항 공사가 시작되었다.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배후지의 무산철산(茂山鐵山)의 개발과 더불어 3대 제철 공장을 비롯하여 방직·기계·유지·통조림 등의 각종 공장이 건설되어 중공업 도시로서도 크게 비약하였으므로, 항만시설도 본항 이외에 어항 부두와 일철 전용부두가 축항되었다.
1943년에 부령군 청암면 일부와 경성군 나남읍과 용성면을 편입시킴에 따라 이곳은 함경북도의 중심 도시가 되었으며 전국 4대 도시의 하나로 비약하였다.
1945년 현재 호구 수는 4만6513호, 23만4388명에 이르렀다. 근대의 인물로는 향리와 서울에 초·중등학교를 세워 육영사업에 힘썼고 일제의 눈을 피하여 간도독립단에 거액의 운동 자금을 헌납한 김기덕(金基德), 기미독립운동사건과 신간회(新幹會) 함경북도 연합회 간부 등으로 활약하던 중 붙잡혀 다년간 옥고를 치렀던 남윤구(南潤九) 등이 있다.
용향동의 양왕자기적비(兩王子紀蹟碑)는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임해군(臨海君)과 순화군(順和君)이 회령에 피난을 갔다가 그곳 관리에게 붙잡혀 적에게 인도되어 이곳에 이르렀을 때 이 마을의 박유일(朴唯一)이 두 왕자를 구원하였다는 내력이 있으며, 이에 따라 1865년(고종 2) 조정에서 창의당(彰義堂)이라는 액면을 내리고 박유일의 집 서쪽에 세운 비석이다.
용향동의 도북사(道北祠)는 1795년(정조 19) 경성군 판관 김회빈(金晦彬)의 품의에 의하여 건립되어 이재형(李載亨)·박흥종(朴興宗) 등 8명을 향사하였다.
선사 유적으로는 1956년 5월 20일부터 6월 30일까지 농포동 신석기 시대의 패총 유적을 발굴하여 동물 유골과 골각기, 각종 패각류를 수집하였으며, 또 농포동과 삼매리에서 청동기 시대의 석관묘를 발굴하였다.
조선 시대 교육기관으로는 1795년(정조 19) 수남동에 관북 지방의 유현(儒賢)을 배향하기 위하여 세워진 도북사에 향현서원(鄕賢書院)이 있었으나 1896년 서원 철폐령으로 철폐되었다.
근대 교육기관으로는 1911년 청진공립보통학교가 최초로 설립되었으며, 1915년 나남공립보통학교가 개교하였다. 1920년에는 실업가이며 애국지사인 김기덕이 청덕학교(淸德學校)를 세웠고, 1943년에는 이 학교에 2년제의 전기학교(電氣學校)를 병설하여 기술자를 양성하였다.
1920년 나남공립고등여학교가 설립되었고, 1924년 나남공립중학교가 개교하였으며, 1928년에는 1923년 경성에 세워졌던 공립사범학교를 이곳으로 옮겼고, 1935년 동나남공립고등여학교가 설립되었다.
청진항에는 1924년 청진공립고등여학교, 1926년 청진공립중학교, 1927년 청진공립상업보습학교, 1930년에 청진공립수산학교 등이 잇따라 설립되었다.
1945년 현재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6개교, 중학교 7개교, 고등학교 5개교, 사범학교 1개교가 있다. 종교 상황은 불교 사찰 2개, 천주교 성당 2개, 개신교 교회 4개가 있다.
이 고장에 전래되고 있는 설화로는 〈양왕자 구출의 전설〉이 있다. 임진왜란 때 선조는 서도로 몽진하고 임해·순화 두 왕자는 네 배신(陪臣)과 함께 두만강변의 회령에 피난하였다가 역적 국경인(鞠景仁) 일당의 모반으로 포박되어 왜장에게 넘겨져 길주 본진으로 압송 도중 지난날 경성군 관하였던 용성을 지나게 되었다.
그 때 이곳에는 선비 박유일이 살고 있었으며, 국난을 당하자 충성심으로 밤낮으로 근심하여 왔는데 어느 날 꿈에 서쪽 언덕 기슭에 문득 두 용이 내려와 큰 구렁이와 벌레 떼로부터 몹시 괴로움을 당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잠이 깨어 하도 심기가 이상하므로 황급히 그곳에 달려가 보니 왜군 일대가 결박한 두 왕자 일행을 둘러싸고 있었다.
이에 박 공은 지난날 꿈이 영감이었음을 직감하고 울분을 참지 못하여, 위험을 무릅쓰고 진중에 뛰어들어 울며 인의(仁義)로써 설득한 끝에 일행을 구해 냈다.
이에 왕자 일행을 자기 집으로 안내하여 여러 날 동안 극진히 모시다가 전란이 평온할 무렵 환궁하게 하였다고 전해지며, 지금 박 공의 옛 집 뜰에는 ‘양왕자기적비’가 세워져 있다.
이 고장의 향토 민요는 찾아볼 수 없으며, 이웃 고장과 마찬가지로 관북 특유의 애수에 찬 근대요인 〈애원성 哀怨聲〉이 전하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바다에 흰 돛 쌍쌍이 돌지만/외로운 사랑에 눈물만 겨워라/(후렴) 에 얼사 좋다 어널널 너리고 상사듸야//세월아 네월아 네가 가지를 말어라/작난한 후걸이 다 늙어 간다//살살 바람에 달빛은 밝아도/그리는 마음은 어제가 오늘이라//간다 간다 나는 돌아를 간다/간다 해도 아주 갈까 정은 두고 간다//오늘밤은 그 얼마나 갔는지/북두야 칠성아 앵돌아졌네//삼천리강산 넓기는 하지만/널과 나와 갈 곳은 그 어디란 말가//빛길 같은 두 손을 이마에 얹고/님 행여 오시는가 바다를 본다…….”
민속놀이로는 지난날 궁사(弓射)놀이·횃불놀이 등이 전래되었으나 근래 신흥 상공업 도시로 발전함에 따라 자취를 감추었고, 다만 세시 풍속으로 씨름·그네뛰기·널뛰기·연날리기·윷놀이 등을 일부 지역에서 행하고 있다.
이곳의 명절 기분은 설과 단오에는 고조되나 추석은 비교적 조용하다. 윷놀이에 쓰이는 윷가락은 남도에서는 나무윷을 사용하나, 이곳은 대부분 강낭콩에 금을 새긴 콩윷을 사용하며, 기후 관계로 실내에서만 행해지는 것이 특색이다.
동제로는 농촌의 산천제와 어촌의 용신제 등 민간신앙이 있었으나, 도시의 발전에 따라 순수한 농촌으로 남아 있는 몇 개의 마을에서만 동제의 고풍이 그대로 남아 있고, 어촌의 용신제는 수산업자들의 풍어제로 변모하였다.
산천제의 목적은 산천신의 가호로 마을에 맹수나 괴질의 피해가 없도록 기원하는 치성으로서, 3월 중 마을 내의 정결한 곳에 제단을 마련하여 돼지머리와 시루떡·감주·백포·백미 등을 제물로 올리고 집집마다 메 한 그릇씩을 지어다 놓으며, 제가 끝나면 그 자리에서 음복하고 삶은 돼지고기는 집집마다 골고루 분배한다.
수성평야(輸城平野)가 있어 경지면적이 넓은 편이며, 그 대부분이 밭이다. 따라서 주요 농산물은 보리·콩 기타 잡곡 등이다. 연안에서는 한·난류의 교차로 어종이 풍부하여 명태·정어리·대구·고등어 등의 어획이 많으며, 특히 정어리는 1930년대 후반 어획량이 많아져 유지화학공업 및 사료로서 큰 몫을 차지한다. 주변의 산지는 임산자원이 풍부하여 그 집산과 제재업이 발달하였다.
광업으로는 나남탄전이 있으며, 공업으로는 풍부한 수력자원과 주변의 철·석탄 등의 지하자원을 이용한 제철·제강·기계·섬유·비료·조선·유지공업 등이 발달하였다. 특히, 1930년대 일본 제국주의의 만주 점령 이후 일본의 대륙 침략 기지로서 정치·군사·산업 및 수륙 교역의 요지로서 급성장하였다.
개항 이래 함경북도지방의 유일한 상품 소비 도시로 각광을 받았으며, 함경선 철도와 간도를 통하는 천도철도(天圖鐵道)가 개통된 뒤로는 도내 각지와 간도 방면으로부터의 곡류와 일본으로부터의 생필품 수입의 집산지로 시장이 크게 번창하였다.
그 뒤 만주 대륙을 연결하는 국제철도가 남양에서 분기되고 두만강 하류의 환상철도가 부설되어 나진이 종단항(終端港)이 된 뒤로는 만주와의 교역은 그쪽으로 빼앗겼다.
그러나 각종 공장의 건설과 수산 기지의 발전으로 부두가 증설되고 시가 확장되어 시내 여러 곳에 공설 시장이 개설되었다. 그 중 청진시장은 청과물 등 각종 농산물과 생필품이 집산하여 인근 각 군에서도 많은 상인들이 모여드는 매일시장이다.
시 남부의 어항 부두에 있는 수산 공설 시장은 규모나 시설이 방대하며 정어리 호황으로 거래액이 국내에서 손꼽혔다. 나남지구내 에는 공설 시장과 우시장이 각각 1개소 있는데, 우시장은 음력 2·7일의 5일장으로 부근에 군납용 도살장과 피혁 공장이 있어 한 장의 축우 매매 두수는 평균 100두에 이른다. 이 밖에 수성지구 내에는 크고 작은 시장이 4개소 있어서 각종 농수산물과 생활필수품의 거래가 활발하다.
교통은 함경선을 통하여 무산 및 만주의 내륙까지 연결되는 한편, 남쪽으로는 해안의 관북 공업 지대 및 북쪽으로 웅기, 아오지의 러시아 국경까지 철도로 연결되어 있다.
또한, 신개척 지방으로 도로가 병행하여 군소 도시 및 농어촌으로 연결된다. 이들 교통 체계는 함경북도 내의 수륙 교통의 요지로서뿐만 아니라 동해 상으로 일본 본토 및 만주 대륙과의 중계 교역항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본래 함경북도에 속하였으나 1960년 10월나남시와 부령군이 편입되어 청암·신암·포항·수남·송평·나남·부령 등 7개 구역으로 확장되어 직할시로 승격되었다가, 1967년 10월 일반 시로 격하되어 다시 함경북도에 편입되었다.
1972년나남구역이 분리되어 부윤구역이 신설되고 1977년 11월무산군과 경성군이 편입되어 다시 직할시가 되었으나, 1985년 9월 다시 일반시가 되면서 함경북도에 편입되고, 본래의 신암(新巖)·포항(浦項)·수남(水南)·청암(靑巖)·송평(松平)·나남(羅南)·부윤(富閏) 등 7개 구역이 되었다. 이 때 무산군과 경성군은 분리되고, 1987년 4월부령구역이 부령군이 되면서 분리되었다.
군의 동북쪽은 나진시, 북쪽은 회령시, 부령군 및 무산군, 서남쪽은 경성군과 접하여 있고, 동남쪽은 동해에 면하여 있다. 동경 129°26'∼130 01', 북위 41°40'∼42°13'에 위치하며, 면적은 1,855㎢, 인구는 66만여 명이다(1996년 현재).
행정구역은 청암구역에 청암1·청암2·반죽(班竹)1·반죽2·인곡(仁谷)1·인곡2·낙량(駱梁)·정산(亭山)·해방(解放)·금바위·역전(驛前) 등 11개 동과 직하(稷下)·부거(富居)·교원(橋院)·마전(麻田)·사구(沙口)·연천(連川)·연진(連津)·용저(龍渚) 등 8개 이, 포항구역에 청송(靑松)1·청송2·청송3·수원(水源)1·수원2·남강(南江)1·남강2·남강3·남향(南鄕)·수북(水北)1·수북2·수북3·북향(北鄕)·산업(産業) 등 14개 동, 신암구역에 교(橋)·근화(槿花)·서흥(西興)·포항(浦港)·천마(天馬)·신암(新巖)·해안(海岸)·신진(新進)·가내 등 9개 동과 동서수라(東西水羅)·대서수라(大西水羅) 등 2개 이가 있다.
또한, 수남구역에 수남1·수남2·어항(漁港)·말음(秣陰)1·말음2·신향(新鄕)·추평(楸坪)·청남(淸南)·추목(秋木) 등 9개 동, 송평구역에 송평·서항(西港)1·서항2·송향(松鄕)·사봉(砂峰)·남포(南浦)·강덕(康德)·농포(農圃)·수성(輸城)·남석·제철(製鐵)·송림(松林) 등 12개 동과 월포(月浦)·용호(龍湖)·송곡(松谷)·근동(芹洞) 등 4개 이, 나남구역에 나흥(羅興)1·나흥2·평화(平和)·이곡(梨谷)·풍곡(豊谷)·나성(羅城)·신흥(新興)·봉천·낙원·새거리 등 10개 동과 용암(龍巖)·봉암(鳳巖)·나북(羅北)·회향(檜鄕) 등 4개 이, 부윤구역에 부윤노동자구와 아양(阿陽)·고성(高城)1·고성2 등 3개 동, 어유(漁游) 1개 이 등 총 1개 노동자구, 68개 동, 19개 이로 되어 있다.
이 군의 북부와 북서부는 함경산맥의 지맥들에 의하여 높고 험준한 산지를 이루고 있으나, 해안으로 가면서 점차 낮아지고 있다. 북동부에는 감투봉(1,043m)·어석산(861m)·설령산(809m) 등이 솟아 있고, 북서부에 교성산(1,754m)·마유산(1,525m)·대렵골산(1,549m) 등이 솟아 있다. 하천은 수성천·나북천·부거천 등이 시내를 지나 동해로 흘러들며, 유역에는 100㎢ 넓이의 수성평야가 펼쳐져 있다.
해안선은 단조로운 편이나 고말단과 갈단이 돌출되어 있고, 경성만과 가동만이 있어 양항의 조건을 갖추었다. 기반암은 화강암·석회암 등이며, 철·니켈·크롬·망간·금·고령토·석회석·석탄 등이 매장되어 있다.
기온은 연평균 6.5℃ 내외, 1월 평균 -9.5℃ 내외, 8월 평균 20℃ 내외이며, 첫서리는 10월 초순경, 마감서리는 4월 말경에 내린다. 연평균강우량은 500∼700㎜이다. 산림은 시 넓이의 80%로서 북서부 일대에는 산림자원이 풍부하여 이깔나무·전나무·분비나무·가문비나무 등이 자라고 있다.
농경지 중 밭이 약 40%를 차지하며, 주요 농산물은 옥수수·쌀·콩·감자 등이다. 수성천·나북천·온포천 유역 일대에 채소 단지가 조성되어 온상 재배를 하는데, 배추·무·시금치·가지·오이·호박·고추·파 등이 생산되고 있다.
산간지대에서는 소·양·토끼 등 초식 가축을 위주로 돼지·닭·오리 등이 사육되고 있으며, 도시 주변에는 돼지공장·닭공장·오리공장·젖소목장 등이 있다. 배·사과·복숭아·백살구 등의 과일이 생산되는 수천 정보 규모의 나남과수농장이 있다.
이 시는 원양어업과 연안어업 기지로서 청진수산사업소 등 비롯하여 10여 개의 수산협동조합들이 배치되어 있으며, 선박·수산 기계·어구·냉동·수산물 가공 공장 등이 있다.
주요 수산물은 명태·도루묵·가자미·청어·송어·멸치 등과 문어·게·밥조개·대합·미역·해삼 등이다. 또한, 북한 굴지의 공업 지대인 청진공업지구를 이루고 있다.
주요 공업 시설로는 북한 최대의 제철소로서, 연간 생산능력 강철 240만t, 주철 210만t, 열압연강철 267만t, 냉압연강철 40만t의 김책제철연합기업소를 비롯하여 청진제강소·나남탄광기계공장·청진조선소·청진철도공장·청진화학섬유공장·나남제약공장·청진고무공장·청진스레트공장·강덕내화물공장·청진요업공장·청직공장기계공장 등이 있으며, 그 밖에 식료품·일용품·가구·문방구 등을 생산하는 지방 공장들이 있다. 그 밖에 부윤니켈광산과 시설 용량 15㎾의 청진화력발전소가 있다.
교통망은 평라선(평양∼나진)·함북선(청진∼나진)·강덕선(강덕∼반죽) 등의 철도가 있으며, 김책·나진·무산·경성·회령 등으로 통하는 도로가 있다.
청진항은 해상 교통의 중심지로 동해의 중요 항구는 물론 자유무역항으로 일본과 러시아 등 각 창구와 연결된다. 청암구역에 부거·판장온천, 나남구역에 용천온천이 있다.
해안에는 동포·남포·순담 등의 석호가 있고, 천꽂이라는 바위 동굴이 유명하다. 송평구역에는 1959년 발굴된 구석기 시대 유물인 농포리원시유적이 있으며, 청암구역에는 부거리고분이 있다.
주요 교육기관으로는 오중흡대학·여명대학·청진광산금속대학·청진의학대학·청진교원대학·청진공산대학·청진국제대학·청진해양대학·청진보건대학·청진경공업대학·청진철도대학과 고등중학교 등 각급학교가 있으며, 청진역사박물관·청진중앙공업 및 농업전람관·포항체육관·청진경기장·극장·영화관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