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9년 4월 일본군 괴뢰정권인 중국 북평(北平)임시정부의 해관(海關)감독 정석경(程錫庚)이 톈진(天津)의 영국 조계 안에서 항일운동을 하던 중국인에게 암살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범인의 인도 문제를 둘러싼 영국 총영사와의 담판이 난항을 거듭하자 같은 해 6월 일본군은 톈진에 있는 영·불 조계를 봉쇄해 버렸다. 표면적인 이유는 암살범의 인도 문제였으나, 이면에는 1935년 12월의 폐제개혁(幣制改革)에서 생긴 중국의 새 통화법폐(通貨法幣)의 신용을 떨어뜨리려는 일본군의 경제 모략이 숨어 있었다.
이러한 영일 간의 외교분쟁이 계기가 되어 1939년 7월 12일 서울에서 재경(在京) 6개 신문사(경성일보·동아일보·매일신보·조선일보·조선신문·조선일일신문)의 발기로 경성배영동지회가 결성되었다.
중국 정부를 원조하는 영국을 배척하고 흥아대업(興亞大業)의 달성을 강령으로 한 배영동지회는 이후 13도 중소도시에까지 확산되면서 장전(長箭)·대전(大田)배영동지회 등을 탄생시켰다. 이들 지역 조직의 상위 중앙조직으로 탄생된 것이 전조선배영동지회연맹이다.
중앙·지방에서 대표 각 30명이 참가하여 같은 해 8월 5일 서울에서 결성되었으며, 영국의 원중행위(援中行爲) 절멸과 영세구축(英勢驅逐), 흥아대업의 달성을 강령으로 하였다. 회장은 윤치호(尹致昊), 부회장은 야나베(矢鍋永三郎), 상무이사는 고재욱(高在旭)·김인이(金麟伊)·신태악(辛泰嶽)·이성환(李晟煥)·함상훈(咸尙勳) 외 일본인 7명, 이사는 지방대표 29명과 중앙대표 18명이었다.
1939년 7월 22일 조선신궁 앞 광장에서 전조선배영대회를 개최하였다. 20여 개 처 지방대표를 포함한 3만여 군중은 지방과 중앙의 대표 14명의 배영연설을 비롯해 결의문과 선언문 낭독 등의 식순을 마친 뒤에 방호단 악대 등을 앞세운 시가지 시위행렬로 기세를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