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대로 이어져온 육의전 비단 점포를 주식회사 체제로 전환하여 생존을 도모하는 한편 자본주의 체제에 적극 적응하여 성장을 추구해 보고자 하였다. 1910년대 설립된 한국인 무역회사와 거의 동일하게 내외생산품의 수출입무역과 매매, 위탁판매 및 관련 금융업 등의 설립 목적을 가졌다. 또 기존 사업의 확장 측면도 있었는데, 종래 외국 상인의 수입품에 의존하던 직물류의 조달을 산지와 직접 거래(무역)하자는 것이었으며, 이를 통해 비단과 마포 등 주요 판매 물품의 수입에서 판매에 이르는 전 과정을 장악하여 유통 마진을 확대하려는 것이었다.
1916년 자본금은 50만 원으로 전액 불입하였는데, 주식의 대부분을 백씨 가문이 소유했고, 경영권도 감사역의 조진태(趙鎭泰)를 제외하면 백윤수와 그의 아들 4형제인 백낙원(白樂元)·백낙중(白樂仲)·백낙삼(白樂三)·백낙승(白樂承)이 독점한 폐쇄적 가족회사였다.
설립 후 영업 성적은 제1차 세계대전의 전시 호황에 힘입어 우수했고, 큰 수익을 내었다. 창립 후 1919년의 4기 영업기까지 평균 30% 이상이라는 고율의 주주 배당을 실현하였으며, 공익사(共益社) 등과 함께 13만 엔에 달하는 거액의 전시이득세(戰時利得稅)를 내기도 하였다. 1920년에는 무역회사 산하에 소규모이기는 했으나 견직물과 마포(麻布)의 생산 시설을 갖춘 직물가공부를 두고 생산을 시작하여 제조업의 영역까지 진출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 종전 후 공황으로 1920년 제5기 영업기에는 무려 12만 6000엔에 달하는 거액의 영업 손실을 입었고 창립 후 최초로 무배당이 실현되었다. 중국산 마포 가격의 폭락에 따른 거액의 적자가 주요한 원인이었다. 1922년 백윤수가 사망하고 장남인 백낙원에 의해 2세 경영이 시작된 이후에도 대창무역의 경영은 매우 불안한 상태가 지속되었다. 그리고 1920년대 장기 불황과 중국산 비단수입 두절이 맞물리며 대창무역의 경영에는 수차례 위기가 있었고, 결국은 파산하였다.
경영난에 허덕이던 대창무역의 재건을 위해 백씨 가문은 1932년 3월 (주)대창사를 설립하였다. 대창사는 자회사 대창직물 생산 제품의 위탁판매점으로 근근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던 대창무역을 개조하고 대형화하였다. 대창사는 주거래 은행인 한성은행의 금융 지원을 토대로 대창무역의 부실채권 전부를 인수하였다. 자본금은 50만 엔(12만 5000엔 불입)이었다. 대창사의 설립으로 대창무역은 사실상 수명을 다한 기업이 되었으나, 법인체가 해산되지 않고 일제말까지 존속했다. 그 이유는 명확하지 않다.
백씨 가문은 누대에 걸친 종로 육의전 전통 상인으로서는 거의 유일하게 식민지 근대화와 자본주의 체제로의 전환이라는 파고를 넘어 살아남았는데, 이것은 전통적 시전상인들이 대개 근대적 개편을 단행하지 못하고 몰락해 버리는 것에 비추어 보면 특이한 예이다. 백씨 가문은 전통 상인에서 근대 산업자본가로 전환에 성공하였고, 1950년대 한국 최초의 재벌이라고 불린 ‘태창재벌’로 재계를 대표하는 대자본가의 반열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