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근대 포경업은 1900년대를 전후하여 동해안에서 러시아 태평양포경회사와 경쟁하는 과정에서 형성되었다. 1904년 러일전쟁을 계기로 러시아 포경선이 사라진 동해의 포경업은 일본원양어업주식회사가 장악하였다. 일본원양어업은 전쟁 발발 직후 나포된 러시아 포경선의 불하(拂下)・대하(貸下) 과정에서 설립준비 중이던 일한(日韓)포경주식회사와 합병이 이루어져 1904년 9월 22일 동양어업주식회사가 되었다. 그리고 1909년 재차 일본내 포경회사의 합동이 단행되면서 동양어업을 중심으로 여타 포경회사를 통합하여 설립한 것이 동양포경주식회사(東洋捕鯨株式會社)이다.
동해안을 거점으로 한국과 일본 연안에서 독점적으로 포경업을 경영할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1909년 5월 일본 전국 포경회사 합동 운동의 결과로 설립되었다. 사장은 ‘일본 근대 포경업의 아버지’로 불리는 오카 주로(岡十郞)였으며, 본점은 오사카시(大阪市) 니시구(西區) 가와구치쵸(川口町) 142에 있었다. 지점은 도쿄(東京)와 시모노세키(下関), 그리고 1910년대 말에는 경성(京城)에도 설치했으며, 도쿄와 하카타(博多)에 출장소를 두었다. 1921년 현재 자본금은 600만 원(375만 원 불입)이었고, 대일본증권·나카하라상사(中原商事) 등의 법인과 오카 주로 등 경영진이 대주주의 지위에 있었다.
동양포경은 이후 한반도 연안과 일본 연근해에 걸친 포경업의 패권을 장악하였다. 설립 초기인 1910년에 이미 25척의 포경선을 보유했으며, 포경 영역도 남해와 서해로 점차 확대되었다. 50개소의 사업소를 두었는데, 한국 연안에도 여러 곳에 포경 기지를 두고 고래 해체장을 운영하였다. 울산 장생포, 거제도, 강원도 장진(長津), 함경도 진포도(陳布島) 등이 대표적 포경 기지였다.
동양포경을 주축으로 한 한일 연근해 포경업은 1920년대 이후 쇠락의 길에 접어들었다. 원인은 남획으로 인한 포획 두수의 급격한 감소 때문이었다. 결국 일본의 포경업은 1930년대에 접어들어 연근해 포경업에서 벗어나 점차 남극과 북극해를 무대로 한 모선식(母船式) 원양 포경업으로 전환하였다. 연안 포경업의 중심이었던 동양포경은 1934년 7월 1일 일본산업주식회사에 합병되어 해산되었고, 일체의 자산과 사업은 일본산업주식회사의 자회사로 1934년 5월 7일 신설된 일본포경주식회사에 의해 승계되었다.
동양포경은 일본 근대 포경업의 출발점일 뿐 아니라 한국 포경업사에서도 큰 의미를 갖는다. 울산 장생포를 한국 포경업의 근거지로 만들었고 이를 통해 지역경제가 활성화되었으며, 해방 후에도 장기간 이런 구조가 이어졌기 때문이다. 비록 국제적으로 포경업이 금지되면서 현재는 그 명맥이 끊어진 상태이지만, 장생포 지역경제에서 포경은 현재도 근대산업문화의 전통으로 여전히 강고하게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