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매축주식회사 ()

근대사
단체
1902년 사토 준조(佐藤潤象) 등이 부산항의 매축을 위해 설립한 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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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1902년 사토 준조(佐藤潤象) 등이 부산항의 매축을 위해 설립한 회사.
설립목적

부산매축주식회사는 부산 북항의 매축을 목적으로 하였다. 구체적으로는 현재의 중구 중앙동 일대를 매축하여 항만시설 확충, 관련 부대시설, 상업시설용 부지를 확보하는 것이었다.

연원 및 변천

설립 당시 자본금은 25만 원으로 일본 토건 재벌이었던 오쿠라재벌(大倉財閥)의 오너 오쿠라 기하치로(大倉喜八郎)가 18만 원을 투자하였다. 나머지 자본은 최초 매축 사업을 계획하고 자본 투자자로 오쿠라재벌을 끌어들이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사토 준조(佐藤潤象)와 다카시마 요시야스(高島義恭)가 출자하였다. 회사 본점은 일본 도쿄에 두었고, 매립 사업의 실무를 담당하기 위해 매립 현장에 부산지점을 개설하였다.

1902년부터 1908년까지 2차례에 걸친 매축을 통해 4만 평의 부지를 조성하였다. 원래 계획은 5만 평이었으나 1907년 시작된 2차 공사의 계획 차질로 매축 면적이 줄었다. 1902년부터 1905년까지 실시된 1차 공사로 매립된 부지는 원래 계획인 3만 1000여 평보다 약간 큰 3만 2000여 평이었다. 1차 매축공사는 1904년 12월 31일자로 완공되어 이듬해인 1905년 2월 18일 준공서가 제출되었다. 이어서 1906년 2차 매축 공사에 들어가려고 했으나 매축권이 취소되어 공사가 중단되는 우여곡절이 있었다. 결국 1907년 4월 1일자로 공사가 재개되어 이듬해인 1908년 8월 31일 2차 공사가 준공되었다. 그러나 매축된 부지는 원래 계획인 1만 7000여 평보다 절반 이상 축소되어 8000여 평이 조성되었다.

매축된 부지는 민간에 판매되었고, 일부는 임대하기도 하였다. 부지에는 공공시설과 상업 시설이 들어섰는데, 대표적인 공공시설로는 부산역과 간이 부두시설인 잔교(棧橋), 부산우체국, 부산세관 등이다. 이 가운데 잔교는 일본 정부의 재정 지원으로 이루어진 항만 시설의 일부였고, 나중에 건설되는 부산 제1 부두의 원형이 되었다. 상업 시설로는 해운 회사, 운송 회사, 창고, 여관 등이 들어섰다. 여관이 많이 들어선 것은 부산역 및 관부연락선의 운항과 관련이 깊다.

매축이 완료된 이듬해인 1909년 10월 9일 부산매축주식회사는 공식적으로 해산되었고, 매립 부지의 판매 등 사업 청산과 관련하여 남은 일들은 부산지점이 담당하였다.

기능과 역할

일제가 대륙 침략의 교두보로 부산항을 개발하는 과정에서 초창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의의와 평가

부산매축회사가 시행한 부산 북항 매축은 근대 부산항 개발과 관련한 대규모 매축공사로는 최초의 것이다. 한말부터 일제말까지 국책적 차원에서 지속적으로 시행된 부산항 개발의 초기 과정을 살펴보는데 주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회사로 평가할 수 있다.

참고문헌

「근대 부산 북항 매축과 시가지 형성」(차철욱, 『한국 민족 문화』 28, 한국민족문화연구소, 2006)
釜山でお昼を(nekonote.jp/pusan.html)
집필자
배석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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