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등포구 ()

영등포구청
영등포구청
인문지리
지명/행정지명ˑ마을
서울특별시의 남서부에 위치한 구.
정의
서울특별시의 남서부에 위치한 구.
개관

동쪽은 동작구과 남쪽은 구로구·금천구, 서쪽은 양천구·강서구, 북쪽은 한강 건너 용산구·마포구와 접해 있다. 위치는 동경 126°52'~126°57', 북위 37°28'~37°33'이다. 면적은 24.53㎢이고, 인구는37만 8504명(2015년 현재)이다. 행정구역으로는 18개 행정동(34개 법정동)이 있으며, 구청은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당산동3가에 있다.

자연환경

전체적으로 한강과 그 지류인 안양천에 인접해 발달한 범람원 충적평야지대로, 대체로 해발 10m 내외의 낮고 평탄한 지역을 이룬다. 이러한 특징은 특히 여의도·선유도의 하중도, 자연제방·배후습지 지역인 경부선의 서부에서 안양천에 이르는 양평·당산·문래동 일대에 뚜렷하며, 제방이 갖추어지기 전에는 많은 범람이 있었다. 그리고 동쪽의 동작구와 인접한 지역은 낮은 구릉을 이루고 있어 여의도 샛강 사이에 포구가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그리고 영등포구 일대의 지질은 대부분 선캄브리아기의 변성암류를 신생대의 충적층이 부정합으로 덮고 있으며, 구의 동남부 신길동 지역은 낮은 구릉을 이루어 해발 30m의 고도를 이루고 있고, 경기편마암복합체에 속한 화강암질 편마암이 분포되어 있다.

영등포구는 한강과 안양천이 만나는 지역으로 산세를 거의 찾아볼 수 없으며, 구로구·양천구와 경계를 이루는 도림천이 구의 동남쪽에 솟아 있는 한남정맥 끝자락 관악산에서 뻗은 낮은 구릉사이의 물줄기와 합류하여 흐르면서 인근의 낮은 지형을 관통하고 있다. 한강변에는 여의도·밤섬과 같이 화강편마암 잔구인 하중도가 발달해 있고, 여의도와 영등포구 충적지 사이의 샛강은 자연생태공원으로 활용되고 있다. 안양천은 청계산에서 발원하여 목감천과 대림천을 합류하여 흐르면서 구의 서쪽 배후습지를 형성하고 있다. 대림천은 일명 마장천이라고도 하는데 관악산의 지봉인 삼성산 북쪽계곡에서 발원하여 관악구·동작구를 지나 영등포구에서 안양천과 합류된다.

기후는 대륙성 기후의 특징을 바탕으로 한강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는 도시기후를 나타내고 있으며, 연평균 기온은 12.1℃, 1월 평균기온은 -2.5℃, 8월 평균기온은 25·1℃, 연 강수량은 1,358.4㎜이다.

역사

영등포구 지역에서 선사문화는 확인되지 않고 있으나, 한강변의 암사동 선사주거지 등을 통하여 볼 때 한강변의 영등포구 일대에도 선사시대 인류들이 살았을 개연성은 높다. 영등포구를 포함한 한강 유역을 무대로 최초의 정치세력이 등장한 것은 진국(辰國)과 삼한사회의 마한(馬韓) 그리고 초기 백제였다. 서기전 1세기 말 백제국이 마한을 정복하고 초기 고대국가인 백제(百濟)로 발전하기에 이른다. 이들은 한강 유역의 경제성을 이용하여 보다 많은 생산 활동과 인구 증가를 이루었고 보다 큰 정치집단을 형성하여 4세기 중엽 근초고왕 때에 전성기를 이루었다.

475년 한강 유역은 고구려의 통치하에 들어갔으며, 남평양이 설치되었는데, 영등포 지역은 잉벌노현에 속한 것으로 보인다. 553년 신라가 한강 유역을 차지한 이래 신라 삼국통일의 전진기지가 되었다. 신라는 전국에 9주를 설치했고 영등포구를 포함한 서울지방은 한산주(漢山州)에 편입되었다. 한산주는 757년(경덕왕 16) 지금의 서울지방에 한양군(漢陽郡)을 설치하면서 한주(漢州)로 개칭되었으며, 영등포 지역은 율목군과 곡양현 지역이 되었다. 후삼국시대에는 왕건의 활동으로 태봉의 영토로 편입되었다.

918년 왕건이 국왕에 추대되어 고려왕조를 개창함에 따라 한양군(漢陽郡)은 고려에 편입되었으며, 940년(태조 23)에 전국의 행정구역을 재편성하고 주군현를 개칭함에 따라 한양군은 양주(楊州)로, 한주는 광주(廣州)로 편제되었으며, 영등포 지역에 속했던 곡양현은 금주(衿州)가 되었다. 995년(성종 14) 도제(道制)가 실시되어 금주는 관내도(關內道)에 속하였고 단련사(團練使)가 배치되었으며, 시흥이라는 별호를 얻게 되었다. 1018년(현종 9)에 금주는 양광도에 속하게 되었으며, 1069년(문종 23)에 신경기(新京畿)에 편입되었다. 1172년(명종 2) 금주에 감무(監務)가 설치되어, 지방행정관이 파견되기에 이르렀으며, 1390년(공양왕 2)에 경기좌도에 속하여 과전과 공신전의 반급지역이 되었다.

1413년(태종 13)에 영등포 지역을 포함한 금주는 금천현(衿川縣)이 되었다가 금과현(衿果縣), 금양현(衿陽縣) 등으로 일시 개편되었고, 1416년 다시 금천으로 복구되었다. 1795년(정조 19) 왕의 능행길에 해당하는 지역이 되어 시흥현으로 승격되었다가 1895년 시흥군으로 개편되었다. 영등포 지역은 금천현·시흥현·시흥군의 상북면과 하북면에 해당되었다. 1789년의 호구조사에 의하면 상북면은 원지목리, 구로리, 사촌리, 도야미리, 양평리, 당산리, 선유리, 간포리로 이루어져 320호에 인구는 1,205명이었으며, 하북면은 우와피리, 번대방리, 방하곶리, 영등포리, 신길리, 신고사리로 이루어져 209호에 인구는 731명이었다. 그리고 양평동·양화동의 지명과 관련하여 영등포구 일대는 양화나루를 건너 김포·인천지방으로 가는 길목이었다.

영등포 지역은 1911년에 하북면 영등포리, 신길리, 번대방리와 상북면 도림리로 이루어졌으며, 1914년에 시흥·과천·안산군이 통합된 시흥군의 동면에 속하게 되었다. 1917년 영등포리·당산리·양평리 지역은 영등포면이 되었고, 그 외 지역은 북면으로 남았다. 1931년 다시 영등포읍으로 승격되었으며, 1936년 경성부의 구역확장 때 영등포읍과 더불어 북면·동면의 일부지역과 함께 경성부에 편입되어 영등포출장소의 관할에 속하였다. 1943년 구제 실시에 따라 영등포구가 되었다.

일제강점기에 영등포구는 경인선과 경부선의 분기점에 위치하여 원료와 제품의 수송이 편리해짐에 따라 공업지역이 되었다. 1937년에 실시된 영등포구획정리사업에 따라 공장용지가 확보되어 이미 들어선 조선피혁㈜, 용산공작소㈜ 등 군수산업체들이 들어섰고, 경성방적·종연방적·동양방적 등의 방적공장과 기타 염색·제분·요업·자기·기와·토관공장들이 대량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상수도가 들어오고, 화장장과 공동묘지, 공설시장 등이 설치되고, 1937년에는 노량진에서 영등포까지 전차가 연장되었다. 1945년 6월 말 영등포구의 인구는 11만 1102명이었다.

영등포구는 1949년에 시흥군 동면(東面)의 3개 리, 1963년 김포군 양동면(陽東面)과 부천군 오정면(吾丁面)의 2개 리, 소사읍(素砂邑)의 7개 리, 시흥군 신동면(新東面)·동면의 5개 리를 각각 편입하여 한강 이남의 중서부를 차지하는 큰 구가 되었다. 그 후 1973년에 구의 동부를 관악구로, 1977년에 북서부를 강서구로, 1980년에 남서부를 구로구로 각각 분구함으로써 종래 관할지역의 중심부만 남게 되어 현재의 관할범위로 축소되었다.

영등포구는 한강 이남 지역 중에서는 가장 먼저 서울특별시로 편입되어 시가지화한 곳으로 공업지대로 입지한 전통이 계승되어 많은 공장이 입지해 있으며, 특히 교통이 발달하고 인구가 집중된 부도심을 이루어 일찍이 공설시장이 설치된 이래 일상생필품의 공급지로 기능하였다. 나아가 시가지의 발전과 함께 상가 건물이 번창하게 되었고, 최근에는 대형 백화점과 쇼핑센터 등이 건립되어 상품 유통의 중심 기능을 하고 있다. 한편 주거지로는 각광받지 못하고 있다가 최근에 여의도동과 당산동 등지에 형성된 아파트 단지의 형성으로 고급주택지를 이루었으며, 신길동과 대림동이 주택지로 개발되었다.

특히 한강의 하중도인 여의도를 개발하여 국회의사당을 비롯하여 언론기관·금융기관·사무실용 빌딩 등이 잇달아 건설되어 서울의 새로운 중심지로 자리 잡았고, 특히 우리나라 언론과 금융의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다. 그리고 2005년을 전후하여 재래시장 개발과 영등포도심뉴타운과 신길뉴타운 개발이 진행되어 앞으로 서울 부도심의 중심기능을 수행할 것이다.

유물·유적

신길동에 있는 대방초등학교 자리에는 숙종의 아들인 연령군(連齡君)의 묘가 있었으나 1940년 구획정리에 따라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으로 옮겨졌으며, 남아 있던 신도비(神道碑)도 1967년 육군사관학교로 이전되었는데, 이곳에서 연령군의 것으로 추정되는 검(劍)이 발견되었다. 신도비는 조선 후기 석비의 일반적인 경향을 보여주며 개석을 용마루에는 아치 모양의 용이 새겨져 있다.

또 신길동의 개인소장 조선 이흠례 묘지(朝鮮李欽禮墓誌)가 2001년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이 묘지는 광기라고도 하는데 죽은 사람의 인적사항을 새겨 무덤 앞에 묻는 판석이다. 이 묘지는 임진왜란 이전 백자에 쓰여진 것으로, 이흠례가 태종의 5세손으로 왕실계보를 파악하는데 좋은 자료가 되며, 임꺽정의 난이나 명종 때 왜구의 호남 지방에 침입한 사실을 알려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영등포동4가에는 2004년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된 서울 구 경성방직 사무동(舊京城紡織事務棟)이 있다. ㈜경방은 일제강점기에 한국인 자본에 의해 설립된 섬유공업의 상징적인 건물로 1936년 건립 이래 건물 원형을 대부분 간직하고 있어, 근대 공업사·건축사적 가치가 크다.

영등포구는 한강변에 위치하여 어로와 관련되어 안전을 기원하는 부군당이 많이 설치되어 있었다. 영등포동7가의 상산전, 당산동6가의 부군당, 신길동의 방학고지부군당과 도당이 있다. 상산전과 당산동 부군당에서는 매년 음력 7월 1일과 10월 1일에 제사를 지내는데, 부군당을 중심으로 군웅·칠성·제역·만신·장군·대감·도당·할아버지·할머니 등 8신상이 있어 전통적인 가치가 크다.

교육·문화

영등포구는 공업지대로 발전하여, 근로자와 서민대중이 모여 살았기 때문에 교육기관이 발달하지 못하였다. 광복 전에는 우신·당산초등학교만이 있었으나 광복 후 인구증가와 교육열의 상승으로 영등포구에도 중·고등학교가 신설되었고, 여의도 신시가지개발에 따라 초·중·고교와 유치원·유아원도 늘어났다. 교육기관으로 2015년 현재 초등학교 23개교, 중학교 11개교, 고등학교 9개교가 있다.

문화시설로는 공연장, 미술관, 전시관, 영화관, 도서관, 박물관 등을 비롯하여 지역문화예술의 증진을 위해 활동하는 영등포문화원과 영등포문화예술회관·구민회관 등이 있다. 영등포문화원에서는 구민 가훈전시회 및 가훈 써주기, 명사초청 교양강좌, 단오한마당축제, 영정사진 찍어주기, 우수영화 상영, 청소년음악회, 동 대항 시낭송대회, 문화유적지 탐방 등을 개최하고 있다. 그리고 지역문화예술단체로 영등포구예술인협의회가 활동하고 있다.

당산동에 삼성출판박물관이 있는데 우리나라 1300년의 오랜 출판역사를 한 눈에 살펴볼 수 있는 인쇄 유물을 한곳에 모아 전시하고 있으며, 약 20만 점의 소장품을 보유하고 있다. 또 영등포문화예술회관의 전시실과 캠브리지갤러리에서는 회화·서예·사진전 등을 개최하고 있다. LG사이언스 홀, 영산아트홀, 한국잡지정보관, 헌정기념관 등이 운영되고 있다.

영등포 평생학습관·영등포도서관·국회도서관이 있어 많은 시민들이 찾고 있다. 구의회 건물과 같이 있는 구민회관은 독서실과 체력단련실이 있어 주민들이 많이 이용하고 있다.

종교 관련 기관으로 1978년 무애원(無碍院)이 조계종 포교당 형식으로 들어서 있으며, 은당사(恩堂寺) 등이 있다. 그리고 영등포 일대였던 시흥지역이 천주교 기록에 나타나는 것은 1910년대 가리봉공소, 1920년대 영등포공소, 번대방공소들이 활동한 것으로 나오며 이후 1936년에 영등포본당으로 승격하였다. 광복 후 영등포본당은 도림동본당으로 개칭되고, 그 후 당산동본당, 영등포동본당, 대림동본당 등이 생겼다. 또 돈보스꼬청소년센터에서는 근로청소년들에게 교육 및 정신적·물직적 도움을 주고 있다. 기독교의 경우 1903년 영등포장로교회, 1936년 영등포중앙감리교회, 1946년 성결교회, 1951년 영등포침례교회, 1956년 구세군영등포영문, 1958년 여의도순복음교회 등이 창립된 이래 다양한 교파의 개신교회가 분포되어 있다. 특히 여의도순복음교회는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빠르게 성장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리고 당산동부군당, 영등포동 상산부군당, 신길동도당 등에서 마을의 수호신을 모시고 민속신앙의 당제가 행해졌다.

구민체육센터가 2004년에 수영장 등 각종 체육시설을 갖추고 개관하였으며 다양한 스포츠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또 1989년 조성된 대림체육공원은 축구·배구 등 다양한 체육시설을 갖추고 있다. 여의도 한강시민공원에는 축구장, 수영장, 테니스장 등 여러 체육시설이 갖추어져 있다. 그리고 양평동 체력단련장을 비롯한 각종 생활체육시설이 근린공원과 체력장 및 광장 등에 설치되어 있어 건강 증진을 꾀하는 구민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그리고 오성스포츠산업대학원이 있어 스포츠산업경영의 세계화, 정보화를 선도하고 있다.

민속

세시풍속은 일정한 시기에 주기적·관습적으로 행해지는 연중행사인데, 주로 명절에 따라 행해진다.

대림동에서는 30년 전까지 정월대보름날 민속놀이의 하나인 쥐불놀이가 있었다고 전해지며, 도림천을 경계로 구로구 신도림동(벌동네)과 경기를 펼쳤다고 한다. 쥐불놀이로 한해 처음 보는 둥근 보름달을 보고 그 해 농사의 풍요를 빌었으며, 겨우내 바싹 마른 잔디에 불을 놓으면 논두렁의 해충과 함께 1년 동안의 액운도 저 멀리 사라진다고 믿었다. 민속제례행사로 부군당제와 도당제가 행해지고 있다. 단오축제 때는 영등포공원에서 창포머리감기, 씨름대회, 투호놀이, 제기차기 등의 민속놀이가 행해진다.

민간에서 길흉화복이 이어지면서 현생의 부귀와 저승의 편안함을 기원하는 바램은 각종 굿거리로 남아 전하고 있다. 즉 재수굿, 병굿, 내림굿, 지노귀굿, 대수대명굿, 주당맞이굿, 살풀이굿, 노망굿 등이 있다. 특히 부군당 제의에 유교풍의 제사가 끝나면 부정굿, 당굿, 군웅굿, 제석굿, 장군굿, 대감거리, 불사굿, 창부거리, 지신밟게, 소지올리기, 영산 등의 제의를 행하였다.

설화·민요

신길2동 37번지 일대는 밤고지고개라고 부르는데, 부군당(府君堂)이 있어 매년 음력 10월 3일에 제사를 지낸다. 일제 때 동네에 살던 한 일본인이 죽어 상여가 이 고개를 지나가는데 행렬 속의 말발굽이 땅에 들어붙어 꼼짝도 하지 않았다. 놀란 일본인들이 엎드려 절을 하는 등 갖은 노력 끝에 이틀 만에 겨우 말굽이 떨어져 장사를 지낼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그 후 주민들은 상이 나더라도 고개를 지나지 않고 옆길로 돌아가는 것이 불문율로 되었다.

당산은행나무에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약 500년 전 조선 초 어느 왕이 언덕을 지나다가 쉬었던 기념으로 은행나무 두 그루를 심었다고 한다. 그 후부터 이 나무는 마을 사람들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고, 마을의 안녕과 국태민안의 수호신으로 삼아 제사를 지내왔다. 6·25전쟁 때 한 그루가 소실되었는데 마을 사람들이 다시 한 그루를 심었다고 한다.

신길동 한강변 흰 모래사장과 언덕에는 소나무·등나무가 무성하여 경치가 빼어나 학이 놀다가는 곳으로 방학곶이라 부르고 부군당이 있다. 구전에 의하면 옛날 윤정승이 물난리로 물에 빠져 정신을 잃었을 때 잉어가 나타나 등에 태워서 방아곶지 기슭의 모래밭에 내려주어 살아났다고 하여 윤정승이 당을 지어 제를 지냈다고 한다. 그 후 후손들이 마을의 안녕과 행복을 위해 매년 3번씩 제사를 지내고 있다고 한다. 신길동 북단 올림픽대로변 여의도 샛강 가에 있는 큰 바위 아래로 강물이 흘렀는데 수심이 깊어 이곳에서 놀던 사람들이 주위 풍경에 도취되어 실수로 물에 빠져 죽는 일이 많아 귀신이 붙었다고 하여 귀신바위라고 불렀다. 또 바위 옆에는 커다란 느티나무가 하나 서 있는데 전설에 의하면 이 나무는 1790년대 정조 때 왕비가 이곳을 지나다 주위 풍경이 너무 아름다워 잠시 쉬어갔던 기념으로 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그 후 마을사람들은 이 나무를 마을의 수호신으로 믿어 마을의 재앙을 막고 복을 기원하기 위하여 1년에 한 번씩 모여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현재는 여의도 개발로 절반쯤 묻힌 바위와 느티나무가 서 있다.

도림동 일대는 인천으로 가는 길목으로 주막거리로 발전하였고, 세태를 반영하는 민요인 ‘창부타령’ 등의 경기잡가가 널리 유행된 곳으로 전한다. 옛날부터 동제와 산제를 지내던 부군당이 두 곳 있었다.

산업·교통

영등포구는 1900년대 초기까지 취락발달은 극히 미약했으나, 철도의 개통과 공업지역의 건설로 큰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지형이 낮고 평평하며 한강·안양천의 풍부한 공업용수 등 공업 입지에 적당한 조건을 갖추고 있어 당산동·양평동·문래동·도림동 지역은 공업지대를 형성하였다. 나아가 한국 최대의 공업지대인 경인공업지대의 핵심을 이루었으며, 현재의 공업 특징은 경성방직 등 섬유산업을 중심으로 식품·음료공업 등 대규모의 노동집약적 공업이 특색이고, 기계·화학 등의 공업은 규모가 작은 편이다. 한편 21세기에 들어 새로운 디지털 공업단지로 탈바꿈하고 있다. 즉 첨단정보기술 집적단지로서의 여의도지구, 유통·상업시설의 고밀도 집적지역으로서의 영등포삼각지구, 하이트·방림방적지구, 문래동공장지구의 4개 지구의 영등포벤처밸리 육성개발계획이 추진되고 있다.

영등포동은 상업지구를 형성하여 서울 최대의 부도심(副都心)을 이루고 있다. 특히 경부선과 경인·경수전철이 머무르는 영등포역이 있고, 인천으로 나가는 경인로를 위시하여 양평로, 영등포로 등 많은 차량이 오가는 교통의 요충이자 상업중심지구이다. 이곳에는 유흥음식점이 즐비하고 상공업이 발달한 부도심지여서 모든 은행의 지점이 설치되어 있다. 영등포역에서 시장로터리로 이어지는 곳에는 1982년에 길이 240m의 지하상가가 건설되어 이 일대 상업은 더욱 번화해졌으며, 신세계, 경방필, 롯데백화점 등의 쇼핑센터가 있다. 또한 여의도에는 전 업종에 걸쳐 458개사의 회원으로 구성된 국내 최고의 민간경제단체인 전국경제인연합회와 한국의 ‘월’가로 불리는 여의도 증권타운 중심에 자리한 한국증권거래소, LG트윈타워, 영등포유통센터, 국내 최초의 회원제 창고형 유통업체인 프라이스클럽 등이 있어 한국경제의 중심지 구실을 하고 있다.

영등포의 위상은 여의도의 개발과 이에 따른 교량건설로 변화되었다. 1970년대 초기부터 개발되기 시작한 여의도는 고도로 발달한 4차 산업의 업무기능들이 집중됨으로써 서울의 또 하나 중심부를 이루고 있다. 마포대교·원효대교의 가설로 도심부와의 접근성이 과거 어느 때보다 더 좋아진 영등포 지역에는 노동청·원호청과 각종 협회, 금융기관 등이 들어서 각종 업무기능이 증가하고, 아파트단지 등 주택지의 확장으로 사통팔달의 교통로가 발달하였다.

또 우리나라 최초로 개통된 경인선, 뒤이어 개통된 경부선과 이에 따른 영등포역의 설치 및 호남선의 개통, 이에 더해 1917년 한강인도교(한강대교)의 준공으로 한강 남부지역과 서울 중심부를 잇는 교통의 요지가 되었다. 또한 지하철 2호선이 남북으로 관통하고 지하철 5호선이 동서로 지나고 있어 교통이 편리하다. 특히 영등포 역전 부근에서 영등포시장 주위에 이르는 지역에는 서울 도심의 종로나 명동에 못지않게 사람과 차량이 붐비기로 유명하다.

주요도로로는 올림픽대로와 노들길·여의동로·여의서로·제물포길·여의대로·용호로·의사당로·선유로·당산로·양평로·버드나룻길·성산로·서부간선도로·영등포로·웃당산길·경인로·대방로·노량진로·도림로·도신로·신길로·가마산길·대방천길·시흥대로 등이 있어 구의 동서남북을 연결하고 있다.

우리나라 최초로 개통된 경인선과 뒤이어 개통된 경부선이 지나고 영등포역에서 호남선 열차가 출발하는 등 철도교통의 중심이 되고 있으며, 지하철 1호선이 지나 인천·수원·천안으로 이어지고 있다. 또한 지하철 2호선이 구의 남북으로 관통하고 지하철 5호선이 동서로 지나고 있어 교통이 편리하다. 현재 지하철 9호선도 관통하고 있다.

관광

영등포구의 관광자원은 한강과 어우러진 자연이 으뜸이다. 특히 63빌딩을 비롯하여 여의도공원, 윤중로, 선유도공원, 한강둔치 등은 서울의 새로운 관광중심지로 도심 속에 아름답게 자리 잡고 있다. 특히 여의도와 밤섬이 있어 모래밭과 습지대는 철새들의 낙원이 되고 있다. 즉 밤섬 일대는 청둥오리 등의 조류와 각종 식물들이 서식하는 한강의 환경보전구역이 되었으며, 현재는 철새 도래지로 보호되고 있는데 밤섬을 관찰하기 위해서 여의도 시민공원 앞에 조망대를 설치해 놓고 있다. 뿐만 아니라 선유도공원과 여의도샛강공원은 자연생태공원으로 자연학습과 관광지로 유명하다. 또 여의도윤중제가 열리는 거리에는 낙엽거리와 벚꽃거리로 봄·가을에 많은 인파가 붐비고 있으며, 여의도 선착장은 한강 물줄기를 따라 잔잔한 물살을 헤치며 여의도와 뚝섬·잠실 등지를 오가는 한강유람선이 운행 중에 있다.

또 양화교 앞에 자리한 인공폭포는 높이 18m, 넓이 90㎡로 동양에서 가장 큰 인공폭포로서 주변이 녹지대로 조성되어 시민의 휴식공간으로 많이 이용되고 있다.

여의도에 있는 대한생명 63빌딩은 높이 264m, 지상 60층, 지하 3층, 연건평 16만 평으로 초고층 전망대, 대형 실내수족관, 초대형 아이맥스영화관, 볼링센터 등이 있어 서울시민 뿐만 아니라 외국인까지도 즐겨 찾는 명소이다. 그리고 여의도관광호텔, 호텔 라스베가스, 영등포관광호텔, 테마모텔 등 관광객을 위한 고급 호텔이 있으며, 국회의사당-KBS방송국-LG트윈타워-여의도공원-63빌딩-여의도선착장-한강시민공원-양화 인공폭포를 돌아보는 관광코스가 개발되어 있다. 그리고 관광쇼핑 장소로 신세계백화점 영등포점, 철도청과 민간기업이 합동으로 본격적인 역사백화점 시대의 새로운 장을 연 롯데백화점 영등포점, 경방필백화점 등에 다양하고 편리한 쇼핑공간 및 문화·레져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그리고 여의도에서는 해마다 벚꽃축제와 세계불꽃축제가 열린다. 여의도윤중제는 서울에서 가장 아름다운 벚꽃길로 명성이 나 있는데, 매년 봄 도로를 따라 1400여 그루의 왕벚나무가 5.7㎞ 줄지어선 벚꽃터널은 하얀 꽃비가 내리는 환상의 산책코스로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제례의식과 축제행사로 전래되어 온 단오제를 통하여 한국무용, 사물놀이, 소리가락장구 등의 민속공연 등이 개최되어 영등포구의 입지에 맞는 향토문화축제로 계승·발전시키고 있다. 한편 영등포구예술인협의회는 미술, 서예, 문학, 사진, 공예, 무용, 음악, 국악 분과가 있어, 해마다 목련전이라는 이름으로 전시회를 하고 있으며, 구민휘호대회, 무료 가훈 써주기, 무료 영정사진 찍어주기, 구민 대상 각종 문화강좌와 문예·사진공모전, 좋은 영화무료상영회, 구민노래자랑, 구민시낭송대회, 청소년미술실기대회, 청소년음악회, 영등포공원예술제 등 문화예술의 저변을 확대하기 위한 각종 사업을 펼치고 있다.

동(洞)
  1. 당산동(堂山洞)

구의 북쪽에 있는 동이다. 동쪽은 여의도동, 서쪽은 양평동, 남쪽은 영등포동, 북쪽은 한강을 경계로 마포구 합정동과 접해 있다. 마을 언덕에 부군당(府君堂)이 있었던 데서 동명이 유래되었다. 경기도 시흥군 상북면·북면 당산리였다가 1936년 경성부에 편입되어 당산정이 되어 영등포출장소 관할이 되었고, 1943년 구제가 실시되면서 영등포구에 속하였다가, 1946년에 당산동이 되었다.

1912년 일제강점기부터 조선피혁주식회사 등 방적·기계·맥주·장유(醬油) 등의 공장이 들어서기 시작하였고, 1960년 이후에는 정부의 공업정책에 따라 많은 공장들이 세워지고 상가가 형성되었다. 1970년대 후반부터 고층아파트가 들어서고 유흥업소가 생기면서 당산로 주위는 번화가가 되었다. 영등포구청·영등포경찰서·구민회관·국립농산물품질관리원이 있다.

지하철 2호선 영등포구청역과 당산역이 있다. 수령 500년의 은행나무가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으며, 대방광불화엄경, 월인석보, 제왕운기 등 국보·보물급 문화재를 포함한 출판인쇄물과 고활자·인쇄기구·문방사우와 그 밖의 관계유물 40여 만 점을 소장하고 있는 삼성출판박물관이 있다.

한편 1936년부터 시행한 구획정리사업이 1947년 9월 8일 완료되고 또한 광복과 6·25전쟁 후 인구가 증가하게 되어 샛강을 사이로 여의도와 마주하고 있는 동쪽 지역만을 당산동으로 남기고 나머지 지역을 당산동1·2·3·4·5·6가로 분할하였다. 그 시기는 불분명한데 1955년 4월 18일 동제 실시 때 분할된 것으로 나타나 이때 문서화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당산동1가에서 6가까지 영등포구의 법정동으로 되어 있다.

  1. 영등포동(永登浦洞)

구의 중앙에 있는 동이다. 동쪽은 여의도동·신길동, 서쪽은 당산동·문래동, 남쪽은 신길동·도림동, 북쪽은 당산동과 접해 있다. 동명의 유래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인근 신길동의 방아곶이나루와 연관하여 영등굿이 행해지던 갯마을(포구)이었던 것과 관련된 것으로 추정된다. 경기도 금천현(衿川縣) 하북면에 속하였다가, 1914년 시흥군 하북면 하방하관리(下方下串里)와 중종리(重宗里)를 합쳐 북면 영등포리로 불리었고 1920년에 영등포면이 되었다. 1931년 읍으로 승격되었으며, 1936년 경성부에 편입되면서 영등포정이 되었다가 1943년 구제가 실시되어 영등포구에 속하였고, 1946년 영등포동으로 바뀌었다.

1936년부터 구획정리사업이 추진되어, 1947년 완료되면서 새로운 도시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서울특별시의 대표적인 부도심 지역으로서 경부선과 경인선이 지나는 교통의 중심이며 상공업이 발달하였다. 영등포역·영등포우체국·영등포소방서·근로복지공사·한강성심병원 등 공공기관과 신세계·롯데·경방필백화점을 비롯한 많은 영등포시장·남서울시장 등 재래시장과 상가 및 유흥업소가 밀집해 있다. 그리고 영등포공원과 중마루공원이 있어 시민의 안식처가 되고 있다.

한편 1936년부터 시행한 구획정리사업이 1947년 9월 8일 완료되고 또한 광복과 6·25전쟁 후 인구가 증가하게 되니 경부선 남쪽 지역만을 영등포동으로 남기고 그 북쪽 구획정리사업이 완료된 지역을 영등포동1가~8가로 분할하였다. 그 시기는 불분명한데 1955년 4월 18일 동제 실시 때 분할된 것으로 나타나 이때 문서화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영등포동1가에서 8가까지 영등포구의 법정동으로 되어 있다.

  1. 여의도동(汝矣島洞)

구의 동북쪽 끝 한강 가운데 섬으로 형성된 동이다. 서쪽은 영등포동·당산동, 남쪽은 신길동과 동작구 대방동, 북쪽은 한강 건너 마포구와 용산구에 접해 있다. 동명의 유래는 홍수로 섬이 잠길 때 지금의 국회의사당이 있는 양말산만은 잠기지 않아 부근 사람들이 그것을 ‘나의 섬’, ‘너의 섬’이라고 부른 것을 이두식으로 표기된 것이다. 한성부 북부 연희방 여의도계(汝矣島契)에 속하였다가, 1914년 밤섬과 함께 고양군 용강면 여율리(汝栗里)가 되었다. 1936년 경성부에 편입되면서 여의도정으로 바뀌어 영등포출장소 관할이 되었고, 1946년 여의도동이 되었다.

1916년 비행장이 건설되어 1958년까지 사용되었다. 1968년 서울특별시의 여의도개발계획에 따라 상업지역과 주거지역, 녹지지역, 업무지역을 포함하는 새로운 도시로 탈바꿈하기 시작하였는데, 연장 7㎞의 윤중제(輪中堤)를 쌓아 87만 600평의 신도시가 형성되었다. 밤섬은 조선업과 감초 등의 약재, 뽕나무도 유명한데 이를 폭파시켜 여의도 윤중제 건설에 필요한 흙과 돌을 채취하였다.

마포대교·여의교·서울교·원효대교·서강대교로 강북과 강남으로 연결되며 지하철 5호선이 개통되어 교통이 원활하다. 여의도광장은 공원으로 조성되었고, 국회의사당·국회도서관·KBS·증권거래소·대한생명 63빌딩과 많은 업무용 건물이 들어서 있으며, 한국의 금융중심지역으로 구실하고 있다. 그리고 여의도샛강생태공원이 꾸며져 있어 자연학습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1. 양평동(楊坪洞)

구의 서북 끝에 있는 동이다. 서쪽은 안양천을 경계로 양천구 목동, 북쪽은 한강을 경계로 마포구 망원동, 동쪽은 당산동, 남쪽은 문래동과 접해 있다. 동명 유래는 한강 나루터인 양화진(楊花津) 근처 벌판에 형성된 마을인 데서 붙여졌다. 경기도 시흥군 상북면·북면의 양평리였다가 1931년 시흥군 영등포읍 양평리가 되었다. 1936년 경성부에 편입되면서 양평정이 되어 영등포출장소 관할이 되었다. 1943년 구제 실시에 따라 영등포구에 속하였고, 1946년에 양평동으로 바뀌었다.

양평동은 안양천과 한강이 만나는 지역으로 홍수 피해가 잦은 지역이었다. 1928년 경성부 도시계획(京城府都市計劃)에 의해 양평동을 비롯하여 영등포동·당산동·도림동 등이 공업지대로 지정하였다. 현재 이 지역 공업의 특징은 섬유·식품·음료를 중심으로 한 노동집약적 공업이 대부분이여 기계·화학공업 등은 규모가 작은 편이다. 안양천변으로 서부간선도로, 한강변으로 올림픽대로가 지나고, 선유로가 양화대교와 이어지며, 지하철 5호선이 지난다.

양평교회 건립 기념으로 심은 수령 90년의 열대지방 희귀수목인 둥근 잎 느티나무가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다. 한편 1936년부터 시행한 구획정리사업이 1947년 9월 8일 완료되고 또한 광복과 6·25전쟁 후 인구가 증가하게 되니 안양천변의 둔치 일부만을 남기고 구획정리된 양평동은 1~7가로 분할되었다. 그 시기는 불분명한데 1955년 4월 18일 동제 실시 때 분할된 것으로 나타나 이때 문서화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 1970년 양평동7가는 폐지되었다. 따라서 양평동1가에서 6가까지 영등포구의 법정동으로 되어 있다.

  1. 도림동(道林洞)

구의 중앙 서쪽에 있는 동이다. 동쪽은 신길동, 서쪽의 문래동, 남쪽은 대림동·신길동, 북쪽은 영등포동과 접해 있다. 동명 유래는 마을 뒤쪽의 야산이 성처럼 둘러싸고 있다 하여 되미리, 도야미리(道也味里)라고 하던 것이 음이 바뀌어 도림리(道林里)가 되었다. 경기도 시흥군 상북면 도야미리였다가, 1914년 북면 도림리로 변하였다. 1936년 경성부에 편입되면서 도림정이 되어 영등포출장소 관할이 되었다가, 1943년 구제 실시에 따라 영등포구에 속하였고, 1946년에 도림동이 되었다.

도림천 인근은 농업지역이었으며, 인근의 문래동에 공장이 들어서면서 도시화되기 시작하여 중소업체가 많이 입주해 있고, 단독주택과 다가구주택이 많다. 이곳은 인천으로 가는 길목으로 주막거리로 발전하였고, 세태를 반영하는 민요인 ‘창부타령’ 등의 경기잡가가 널리 유행된 곳으로 전한다. 옛날부터 동제와 산제를 지내던 부군당 두 곳이 있다.

  1. 문래동(文來洞)

구의 중앙 서쪽에 있는 동이다. 동쪽은 영등포동, 서쪽은 강서구 신정동, 남쪽은 도림동, 북쪽의 당산동과 접해 있다. 동명 유래는 일제강점기 이곳에 방직공장이 들어서면서 일본인들이 사옥정이라 부르던 것을 방적기계의 물레와 문익점의 목화 전래의미를 빌려 문래동이 되었다고 한다. 1943년 도림동에서 분동되어 영등포구 사옥정이 되었고, 1946년 사옥동이 되었다가 1952년경에 문래동으로 개칭되었다.

이 지역 일대는 늪지대로서 갈대숲을 이루었는데, 일제강점기에 영등포초등학교와 종연(鐘淵)·동양 등 방직회사들이 들어서면서 마을이 개발되기 시작하였다. 1960년 이후 인구가 급증하였으며, 많은 군소공장들이 입주하였다. 문래근린공원은 5·16군사정변의 발상지인 당시 제6관구사령부가 있던 곳으로 박정희 전대통령의 흉상이 남아 있다.

한편 1936년부터 시행한 구획정리사업이 1947년 9월 8일 완료되고 또한 광복과 6·25전쟁 후 인구가 증가하게 되니 문래동 일대에 구획정리사업이 진행되어 문래동은 1~6가로 분할되었다. 그 시기는 불분명한데 1955년 4월 18일 동제 실시 때 분할된 것으로 나타나 이때 문서화된 것으로 보인다. 현재 문래동의 법정동은 없으며, 문래동1가에서 6가까지가 영등포구 법정동으로 되어 있다.

  1. 양화동(楊花洞)

구의 서북쪽 끝에 있는 동으로 면적과 인구의 통계는 양평동에 편입되어 있다. 북쪽은 한강 건너 마포구 망원동, 서쪽은 안양천 건너 강서구 염창동, 남쪽은 안양천 건너 양천구 목동(木洞), 동쪽은 양평동과 접해 있다. 경기도 양천군 남산면 양화리였다가, 1914년 김포군 양동면 양화리가 되었으며, 1936년 경성부에 편입되어 영등포출장소 양화정이 되어 영등포출장소 관할이 되었다. 1943년 구제 실시에 따라 영등포구에 속하게 되었다가, 1946년 10월 양화동이 되었다. 동명 유래는 버드나무가 많은 나루터인 양화도가 있었던 데서 연유되었다.

한강과 안양천이 만나는 지역의 습지로 유로변천이 많았던 곳이다. 성산대교로 마포구 망원동과 이어져 있으며, 김포국제공항까지 연결되는 공항로가 지나고 올림픽대로 염창IC가 있다. 양화교 앞에 18m 높이의 인공폭포가 있다. 선유정수사업소가 있던 곳은 선유도공원으로 꾸며져 자연생태학습장으로 구실하고 있다.

  1. 신길동(新吉洞)

구의 남동쪽에 있는 동이다. 동쪽은 동작구 대방동, 서쪽은 도림동과 영등포동, 남쪽은 대림동과 동작구 대방동, 북쪽은 여의도동과 접해 있다. 동명 유래는 정확하지 않으나 신기리라 불렸던 마을이름과 새로운 좋은 일이 생기기를 기원하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으로 보고 있다. 경기도 금천현 하북면 신길리였다가 1914년 시흥군 북면 신길리가 되었으며, 1936년 경성부에 편입되면서 신길정이 되어 영등포출장소 관할이 되었다. 1943년 구제 실시에 따라 영등포구에 속하게 되었다가, 1946년 신길동이 되었다.

이곳은 영등포에서 한강을 건너 서울로 들어가는 방학호진(放鶴湖津) 즉 방아곶이나루가 있어 교통의 요지였다. 지하철 1호선과 5호선 환승역인 신길역이 있다.

  1. 대림동(大林洞)

구의 남쪽 끝에 있는 동이다. 동쪽은 동작구 신대방동, 서쪽은 도림천을 경계로 구로구 구로동, 남쪽은 금천구 가리봉동, 북쪽은 도림동·신길동과 접해 있다. 동명은 신대방동의 ‘대’자와 신도림동의 ‘림’자를 따서 붙인 데서 유래되었다. 금천현 상북면 도야미리(道也味里) 지역이었는데, 1914년 시흥군 북면 도림리가 되었고, 1936년 시흥군 동면에 속하게 되었다. 1949년 영등포구에 편입되면서 도림리는 구로리·번대방리와 함께 신도림동이 되었고, 1980년 신도림동은 구로구 신도림동과 영등포구 도림동으로 분동되어 오늘에 이른다.

동의 북서쪽에는 도림로, 남동쪽에는 시흥대로가 지나고, 지하철 2호선 대림역과 구로디지털단지역 및 지하철 7호선이 지나 대중교통 이용이 편리하다. 한림대학교부속 강남성심병원, 대림성모병원, 명지성모병원이 있고, 썬프라자백화점, 대림시장, 중앙시장, 두암종합시장 등이 있으며, 서울디지털산업단지와 구로디지털단지역이 주변에 있다. 1989년 조성된 대림체육공원이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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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교통사』(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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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등포의 명소와 지리』(영등포구청,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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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사』(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1985)
『서울의 전통문화』1·2(서울특별시문화재위원회, 1982·1986)
『서울육백년사』1~6(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1977~2006)
『한국지명총람』1(한글학회, 1966)
『조선전도부군면리동명칭일람』(월지유칠, 1917)
「서울특별시 구행정변천고」(나각순, 『향토서울』46, 1988)
영등포구(www.ydp.go.kr)
관련 미디어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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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각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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