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씨개명한 이름은 시라카와 라쿠쇼(白川樂承)다.
종로 시전 상인 백윤수의 4남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백윤수상점은 시대와 기업환경이 변화함에 따라 1916년 대창무역주식회사, 1924년 대창직물주식회사, 1935년 태창직물공업주식회사로 계승되었다. 1915년 메이지(明治)대학 전문부를 졸업하고 1919년 니혼(日本)대학 상과를 졸업하였다. 니혼대학 재학중이던 1916년 부친이 설립한 대창무역주식회사 이사에 선임되었고, 1924년 9월 대창직물주식회사 이사가 되었다. 1926년 금전대부업을 하는 애국합명회사 사장, 1932년 대창사 이사, 1935년 삼화제약 사장을 역임하는 등 백씨 일가가 설립한 회사의 이사로 경영에 참여하거나 직접 회사를 차려 경영하였다.
1939년 태창직물주식회사 사장이던 백낙원(白樂元)이 사망하자 경영권을 이어받아 사장에 취임하고 사업을 확장시켰다. 같은 해 8월 경성 창신공립심상소학교 강당 신축비로 2천원을 냈고, 12월 1만원을 국방비로 기부하였으며 한해구제기금으로 3천원을 바쳤다. 창신공립심상소학교에 2천원을 기부한 일로 1941년에 조선총독부로부터 포상을 받았다. 같은 해 12월 해군기 제작비로 7만 5천원을 기부했고 비행기 1대를 기부하였다. 1942년 대전 흥아직포공장을 설립하였고, 선광(鮮光)수출공예주식회사 사장으로 활동하였다.
전쟁이 장기화되며 1940년대가 되면 직물업 중심에서 조선총독부가 추구하던 군수중공업장려정책에 부응하여 군수품을 생산하는 업종으로 사업을 확대하였다. 1942년 6월 125만원을 투자하여 조선도변주공(朝鮮渡邊鑄工)주식회사 사장이 되어 조선총독부가 국책사업으로 추진한 소형용광로제철사업에 투입되었다. 이 회사는 1943년 일본무연탄제철주식회사로 개명하였다. 1943년 3월 조선총독부가 실시한 군수생산책임제에 의해 생산책임자가 되어 2만 5천톤의 선철 생산하였다.
군수 비행기와 함께 중요 군수품인 함선 건조를 위해 조선업으로도 투입되어 1944년 3월 기존 2개의 조선소와 1개 철공소를 합자하여 설립한 강원조선철공주식회사에 125만원을 투자하고 사장이 되었다. 이 회사는 조선총독부의 ‘계획조선’에 의해 연간 선박 15척을 건조하도록 할당받고 이를 생산하였다. 이외에도 1944년 8월 박흥식(朴興植)이 주도한 군수업체 조선비행기공업주식회사 설립에 참여하여 주식 2만주를 인수하였다. 1945년 4월에는 일본무연탄제철주식회사가 군수회사법에 의해 지정업체가 되어 원자재 우선배당과 전시금융금고로부터 시설운영자금을 투자하자 지속적으로 군수품을 생산조달하는 데 투입되었다.
해방 후 한국민주당에서 활동하는 한편 인민당 본부에 사무실을 제공하였다. 1949년 2월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체포되어 경찰서에 수감되었으나 불기소 석방되었다. 같은 해인 1949년 태창공업주식회사 사장에 취임하였고, 적산기업인 조선기계제작소 관리인이 되었으며, 태창직물주식회사 사장도 겸하였다. 1952년 태창산업주식회사 사장, 1956년 태창방직주식회사 사장에 취임하였다. 1956년 10월 12일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