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석원은 일제강점기 중일전쟁과 북어사건이 일어났을 때 군인이자 교육자로 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 1893년(고종 30)에 태어나 1978년에 사망했다. 가네야마 샤쿠겐[金山錫源]이라고 창씨개명하였다. 1908년 대한제국 무관학교에 들어갔다가 1915년 일본육사를 졸업하였다. 1937년 중일전쟁에 참전하고 귀국하였다. 귀국한 후 침략전쟁을 선전하고 조선인의 입대를 권유하는 등 적극적인 참여를 선동하였다. 1949년 북한산 북어를 밀무역해 이익을 챙긴 ‘북어사건’으로 예편하였다. 이후 원석학원 이사장·5대 국회의원 등으로 활동했다.
1902년 재동소학교에 입학해서 졸업한 후, 1905년 교동고등소학교에 입학했다. 1908년 대한제국 무관학교에 들어갔다. 1909년 9월 통감부에 의해 무관학교가 폐지되자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육군 중앙유년학교 예과 2년으로 편입했다. 1913년 5월 중앙유년학교를 마치고 그해 12월 일본육군사관학교에 진학했다. 1915년 일본육사 제27기생으로 백홍석(白洪錫) 등과 함께 졸업했다.
견습사관을 거쳐 1915년 12월 일본군 육군 소위로 임관해서 보병 제4사단 제61연대에서 기관총대 교관 보좌 및 교관으로 2년간 근무했다. 1919년 중위로 승진해서 8월 보병 제20사단 제78연대(용산)로 전속되었다. 1925년 8월 대위로 승진했고 1927년 같은 연대 제1대대 제3중대장으로 임명되었다. 1928년 1월 훈5등 서보장을 받았다.
1931년 9월 일본이 만주를 침략할 때 제20사단 제78연대 기관총대 대장으로 출전하여 헤이룽장성[黑龍江省] 방면에서 마잔산[馬占山] 군과 싸워 전투를 벌였다. 이때 싸운 공적으로 상금(賞金) 700원을 받았다. 1934년 3월 육군 소좌(少佐)로 승진했고 1936년 8월 제78연대 대대장을 맡았다.
소좌로 재임하던 1936년 이태원에 있던 야학 조양학원을 후원하여 육군용지 600평을 영구히 사용할 수 있도록 주선해 그해 5월 이태원보통학교로 승격시켰다. 광산업자로 유명한 부호 원윤수(元胤洙)가 80만원을 출자해서 이 학교를 성남고등보통학교로 인가 신청했다. 1937년에는 중일전쟁에 출정하는 군인임을 내세워 총독부의 설립허가를 받아 1938년 3월 성남고보가 개교했다. 학교재단 이름을 원윤수와 김석원 이름자를 한 자씩 따서 원석학원이라 하고 종신이사가 되었다.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중국전선으로 출전했다. 베이징 부근 난위안[南苑] 전투에서 1개 대대 병력으로 중국군 1개 사단과 싸워 남원행궁을 점령해 중일전쟁의 영웅이 되었다. 1938년 2월에는 중국 산시성[山西省] 도위안[東苑]고지 전투에서 큰 전과를 거두었다. 그 밖에도 산시성 허진[河津], 지산[稷山] 등지에서 일본 침략전쟁의 첨병으로 활약했다.
1939년 3월 귀국하여 전쟁영웅 대접을 받았다. 4월 5일 부민관에서 열린 개선간담회를 시작으로 함경도를 제외한 전국 군청소재지를 돌아다니며 침략전쟁을 선전하고 조선인의 입대를 권유하는 등 적극적인 참여를 선동했다. 그해 8월 육군 중좌로 진급했으며, 10월 훈3등 서보장을 받았다.
1940년 1월 일본 히로시마현 도쿠야마[德山]에 있는 보병 제42연대로 전속되었다. 그해 12월 중국 산둥성에 있는 독립혼성 제6여단으로 배치되었다가 이후 지난[濟南]군사령부의 간부교육대장이 되어 위관급 장교를 교육했다. 1944년 8월 육군 대좌(大佐)로 승진하여 조선군사령부 평양병사부 제1과장으로 배속되었는데, 근무하면서 전쟁을 선전 · 선동하는 강연을 지속했다.
해방 후 월남하여 과거 일본군 출신을 규합해 1946년 10월 육해공군동지회를 조직하고 회장이 되었다. 성남중고등학교 이사장으로 학생들에게 군사훈련을 가르쳐 논란이 되었다. 1948년 12월 육군사관학교를 특임 8기로 졸업하고 대령으로 임관하여 제1사단장이 되었다. 1949년 3월 육군 준장이 되었다. 1949년 10월 관할구역인 1사단 한국군이 북한산 북어를 밀무역해 이익을 챙긴 ‘북어사건’이 일어나자 이를 두고 국방부 총참모장인 채병덕(蔡秉德)과 대립하다 예편하고 성남중학교 교장에 취임했다.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6월 26일 국방부장관 주재로 열린 ‘군사유경험자회담’에 참가했다. 7월 수도사단장으로 복귀해서 진천지구 전투를 비롯하여 경북 의성, 안동, 청송 지역에서 방어작전을 지휘했다. 8월 제3사단장으로 전보되어 포항전투에 참가했으나 미군사고문단과 의견 대립으로 9월 전시특명검열관이라는 한직으로 발령났다. 현역으로 1952년 성남중고등학교 교장에 취임했다.
무보직으로 5년을 지내다가 1956년 6월 예편 명령을 받으며 비로소 육군 소장으로 승진했다. 1958년 5월 제4대 민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영등포 을)으로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1960년 7월 제5대 민의원 선거에 재차 무소속(영등포 을)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그러나 1961년 5 · 16 쿠데타로 민의원직을 상실한 후 원석학원 이사장으로 취임했다.
김석원의 이상과 같은 활동은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제10 · 11 · 19호에 해당하는 친일반민족행위로 규정되어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Ⅳ-2: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이유서(pp.885∼902)에 관련 행적이 상세하게 채록되었다.
1972년 8월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