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민회가 자유민주주의이념의 확립과 신민족운동(新民族運動)의 전개를 표방하고 활동하다가, 1967년 2월 25일 전국대의원대회에서 당헌을 개정하여 당명칭을 바꿈으로써 민중당이 태어나게 되었다.
이와 함께 같은 해 3월 23일 전국위원회에서 김준연(金俊淵)을 당총재로 추대하여 이튿날 등록을 마쳤고, 다시 대통령 선거 직후인 5월 4일 전국위원회에서 성보경(成輔慶)을 총재로 선출하여 6월 6일 대표자 변경등록을 마쳐 당체제를 정비하였다.
민중당은 조직으로서는, 수도에 중앙당부를 두고 핵심조직체로서 지구당을 국회의원선거구 단위로 두었으며, 또한 서울특별시·부산직할시 및 시·도에 각기 지부를 두었다.
민중당의 당기관으로는 전국대의원대회·중앙위원회·당무위원회·전국위원회·감찰위원회·기획위원회·중앙선거대책위원회·의원총회·중앙정치훈련원이 있었고, 각 기관은 다시 직책과 부서로 세분되었다.
이 당은 신민회를 모체로 하고 있었으므로 정강과 정책도 그 연장선상에 있었다. ① 정의와 진실이 있는 민주정치의 구현, ② 진정한 민주사회의 건설, ③ 서민자본주의 경제체제의 확립, ④ 민주방식에 의한 조국통일의 조속한 완수와 자유·평등·번영이 충만한 민주조국건설을 정책의 기조로 삼았다.
이 당의 활동상황은 활발한 것이 못되었다. 대통령 선거전에 있어서는 1967년 5월 3일의 제6대 대통령 선거에 김준연을 후보로 내세웠으나 총유권자 1393만 5093명 중 24만 8369표 획득에 그쳤고, 1971년 4월 27일의 제7대 대통령 선거에 성보경을 후보로 내세웠으나 야당 후보 단일화를 위하여 선거 전날 성보경 후보가 사퇴하였다.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1967년 6월 8일의 제7대 총선에 66명의 지역구 후보와 4명의 전국구 후보를 내세웠으나 당선자를 한 명도 내지 못하였다.
1971년 5월 25일의 제8대 총선에 지역구 37명 전국구 13명의 후보를 내세웠으나, 경기도 제14지역구(김포군·강화군)에서 김재춘(金在春)후보만 당선되는 데 그쳤다. 그나마 김재춘 의원마저 1971년 당에서 제명된 뒤, 1972년 민주공화당(民主共和黨)에 입당함으로써, 이 당은 원내 의석을 확보하지 못하여 활동이 미미하였다.
이후 1972년 10월 17일 대통령특별선언의 정당 및 정치활동중지 규제로 활동을 중단하였고, 정당활동의 재개허용 뒤 법정지구당을 갖추지 못하여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등록취소로 1973년 7월 3일 소멸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