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 상주 출생. 일본 쥬오(中央)대학교 법학부를 중퇴, 민족항일기에 고등문관시험(高等文官試驗) 사법과에 합격하여 광복 뒤 서울고등검찰청 차장검사를 역임하였다. 1954년 고향인 상주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제3대민의원에 당선되면서 정계에 진출하였다.
정계에 투신하면서 사회민주주의 이념을 표방하는 혁신계 인사들과 정치노선을 같이하였다. 1956년 조봉암(曺奉岩)·이동화(李東華)·박기출(朴己出)·윤길중(尹吉重) 등과 함께 혁신정당인 진보당 결당대회를 추진하였다.
1958년 자유당의 북진통일론에 반대하는 평화통일론을 표방하였다. 그리고 자유당정권의 장기집권욕으로 인하여 진보당의 혁신계 인사들이 대거 투옥되었는데, 진보당의 부위원장이었던 그도 체포되었으나 대법원에서 무죄로 석방되었다.
그 뒤에도 계속 혁신정당의 조직을 위하여 활동하다가 제2 공화국을 맞이하면서 사회대중당을 결성하였다. 제5대 민의원에 당선되고 사회대중당의 중앙집행위원장을 역임하면서 한국의 보수정치체계에서 혁신정당의 정착을 위하여 진력하는 지도급 인사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1961년 5·16이 발발하면서 사회민주주의 인사를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부정하는 자로 간주하였던 군사혁명 세력에 의하여 군사혁명재판소에 체포되어 15년의 징역형을 언도받게 되었다.
결국, 분단의식이 과잉 내면화된 당시의 한국적 정치상황하에서 그는 사회민주주의의 정치이념을 정착시키지 못하고 정치적 핍박만을 받은 채 정계에서 은퇴하였다. 1979년 8월 4일 사망하여 고향인 상주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