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고양에서 태어났다. 1908년 7월 개성보통소학교를 졸업하였다. 1917년 6월 피어선 성경학교, 1928년 1월 감리교 협성신학교를 졸업하였다. 1914년부터 강원도 인제·철원·화천 등지와 경기도 서석·연천·포천 등지에서 구역장으로 활동하였다. 피어선 성경학교를 졸업한 후인 1917년 9월부터 남감리회 전도사로 강원도 철원에 부임하였다. 철원 중심으로 결성된 비밀결사 대한독립애국단에서 활동하다가 1920년 8월에 체포되어 1920년 12월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였다.
출소 후 1923년 9월 목사안수를 받고 경기도 포천에서 목사로 활동하다가 1924년 9월 장감연합공의회 주관으로 일본 간사이[關西] 지방에 교포들을 위한 선교사로 파견되었다. 오사카[大阪]를 중심으로 3년간 포교하다가 귀국한 후 1927년 9월 경성 석교교회를 잠시 담임하였다. 이때부터 『기독신보』 주필로서 1933년 여름까지 활동하였다. 그 사이 1929년 11월 조선어사전편찬회 발기인으로 참여한 바 있다.
1933년부터 1942년까지 석교교회 담임목사를 맡았다. 1933년 가을 YMCA 총무인 신흥우(申興雨)가 파시즘 국가사회주의에 매료되어 결성한 적극신앙단에 참여하였다. 적극신앙단은 개신교 주류였던 서북계열과 대립하다가 조선예수장로회가 이단으로 규정하며 1935년 초 해체된 초교파 신앙운동단체였다. 적극신앙단이 해체된 후 그를 포함한 적극신앙단 계열의 인사들이 반미친일파로 변신하였다.
중일전쟁 직후인 1937년 8월 조선총독부 사회교육과가 주최하는 시국강연반에 연사로 참여하였고, 9월 학무국이 주최하는 제2차 시국강연반에서 경기도 지역 강연을 맡았다.
1939년 10월 적극신앙단계열의 정춘수(鄭春洙)가 감리교 총리원 4대 감독으로 선출되자 기존 간부를 경질하고 그를 포함한 적극신앙단 인사들이 요직을 차지하였다. 1940년 9월 일제의 전시통제기구인 국민정신총동원 기독교조선감리회연맹 이사로 임명되었고, 10월 선전주임을 겸하였다. 1941년 3월에는 감리교 전도주임이 되었다. 1942년부터 1944년까지 목사로 재임하였다.
해방 후 목회 일선에서 떠나 대한기독교서회 편집부장으로 종사하였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후 북한군에 의해 서대문형무소에 구금되었다가 1950년 9월 19일에 사망하였다. 1963년 철원 대한독립애국단 사건공적으로 대통령 표창이 추서되었고, 이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1996년 친일행적이 드러나 서훈이 취소되었다.
박연서의 일제 강점기 활동은 「일제강점하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에 해당하는 친일반민족행위로 규정되어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 보고서』에 관련 행적이 상세하게 채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