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3년 평안북도 정주에서 출생했다. 1908년 정주군 부호육영학교(鳧湖育英學校) 졸업, 1909년 평양 대성학교에 입학했으나 폐교가 되어 경성 보성학교로 전학, 1913년 졸업했다. 1914년 일본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에 입학해 1918년 졸업했다.
일본 유학 중 조선유학생학우회 기관지 『학지광』에 여러 편의 글을 기고했으며, 1917년 4월에는 『학지광』의 발행인 겸 편집인을 맡았다. 1918년 일본 유학생 단체 조선학회 조직에 참여하고 간사를 맡았다. 대학 졸업 후 귀국해 1918년 중앙고등보통학교 교사로 부임했다.
3・1운동 당시 48인으로 피검되었으나 1920년 10월 무죄판결을 받았다. 1921년 중앙고등보통학교 교장에 취임했으며, 1922년 11월 조선민립대학기성준비회 조직에 참여했다. 1924년 8월 조선여자강습회 조직, 1925년 3월 경성교육회 평의원, 이해 7월 조선체육회 위원에 선임되었다.
1929년 2월 재단법인 중앙학원 이사에, 1932년 5월 중앙고등보통학교 교장으로 재취임했다. 1934년 2월 과학데이실행위원회 실행위원, 3월 조선물산장려회 이사, 5월 선전부 이사를 맡았다.
중일전쟁 이후 조선총독부 주최 시국인식 강화를 위한 제2차 시국순회강연회 연사,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의 비상시국민생활개선위원회 제2부 위원에 선임되었다.
1939년 4월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참사, 조선유도연합회 평의원, 1941년 녹기연맹과 국민총력조선연맹 참사, 1941년 임전보국단 발기인으로 활동했다. 친일단체 활동과 강연뿐만 아니라 언론매체에 많은 친일 글을 기고해 전쟁협력을 강조했다.
해방 후 1945년 10월 경성대학 예과과장에 임명되었고, 1946년 2월 보성전문학교 교장에 취임했다. 보성전문학교가 고려대학교로 인가되면서 초대총장으로 취임했다. 한국전쟁 중 납북되었다. 저서로는 『한국유학사(韓國儒學史)』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