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독부의 외곽 정보단체를 겸했다는 설도 있었다.
그 연혁은 1925년 2월 11일(일제의 건국기념일인 소위 기원절)에 창립된 경성천업청년단(京城天業靑年團)에서 시작된다.
이것은 경성제국대학 예과(豫科) 교수로 학생감을 겸했던 쓰다 사카에(津田榮)가 경성제대 안의 극우파 학생을 중심으로 조직했던 천황주의 사상단체이며, 기관지 겸 사상교양지 『묘관 妙觀』을 발행하였다. 이 단체는 1930년 5월에 녹기동인회(綠旗同人會)로, 1933년 2월 11일에 녹기연맹으로 개칭되면서 사회단체로 조직을 확대하였다.
그동안 발행된 『녹기 밑에서』(1929년 11월 창간), 『학생녹기』(1931년 11월 창간), 『녹인(綠人)』(1935년 2월 창간) 등의 기관 인쇄물을 통합해서, 1936년 1월부터는 기관지 겸 사상교양지 월간 『녹기』를 발행하였다. 본부를 서울에, 지부를 13도 각처에 두었던 녹기연맹은 창설 당시에는 일본인들만의 조직이었다.
그러나 중일전쟁 이후부터는 한국인에게도 조직을 개방하였다.
“일본 국체의 정신에 즉하여 건국의 이상 실현에 공헌”함을 강령으로 했던 녹기연맹은 그 실행방책으로 ① 일반 사회교화, ② 일본사상 연구, ③ 중견인물 양성, ④ 사회 후생시설 등의 사업을 수행했다.
제1의 일반적 사회교화는 사상교양지 월간 『녹기』의 발행과 사상강좌·수양회 개최며 도서출판 등이다. 제2의 일본사상 연구를 위해서는 ‘녹기 일본문화연구소’가 개설되었다.
제3인 중견인물 양성을 위해서는 전문·대학생을 위한 학생부, 여학교 졸업자의 교양기관인 청화여숙(淸和女塾), 황도 농본(農本)주의 교육을 위한 녹기농장 ‘오류동 농생숙(梧柳洞農生塾)’ 등의 부대시설을 경영했다.
제4의 후생시설로는 녹기의원(綠旗醫院)과, 일종의 협동조합인 ‘신광각 공제부(晨光閣共濟部)’ 등의 경영이다. 하지만 이런 것은 공개된 표면 사업이요, 이면에서는 총독부의 경비 보조에 의해서 총독부가 터놓고 하기 어려운 매수·회유 등의 사상공작을 수행한 흔적이 보인다. “총독부의 외곽 정보단체”였다는 설은 이런 이면 활동이 있었던 데서 생긴 말일 것이다.
녹기연맹의 구성원은 회장에 쓰다 사까에(津田榮)이다. 그는 경성제대 예과 교수로 국민총력연맹 기타 사상진영의 고위층이었다. 녹기연맹 본부 주간은 그 동생인 쓰다 다께시(津田剛)로서, 친일 황민문단을 만들어낸 장본인이다.
민간이 주도한 황도주의 사상단체였지만 관변측 고관 출신 다수가 평의원으로 참가했다. 한국인으로서 본부 기구에 관여한 자는 이석훈(李石薰, 월간 『녹기』), 이영근(李泳根, 녹기연맹본부), 현영섭(玄永燮, 녹기일본문화연구소) 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