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0년에 오스트리아 빈 교외의 인처스도르프(Inzersdorf)에서 태어났다. 빈상업전문학교를 졸업한 뒤 영국 스코틀랜드로 유학을 가서 영어통역사와 타자-속기사 자격을 취득했다. 스포츠 선수인 헬무트 뵈링거와 결혼했다가 곧 이혼했다.
1933년 2월에 스위스 여행 중 제네바에서 이승만을 만나 1934년 10월에 뉴욕에서 이승만과 결혼했다. 이승만의 독립운동을 옆에서 도왔으며, 이승만이 미국 정부와의 로비를 위해 1942년에 워싱턴에서 조직한 한미협회(The Korean-American Council)에 이사로 참여했다.
먼저 귀국한 이승만을 따라 1946년 3월에 한국에 온 뒤로도 이승만의 비서실장과 같은 역할을 계속했다. 1948년 5월에 미군정에 의해 공포된 국적에 관한 임시조례로 한국 국적을 취득했다. 한국어를 못하기 때문에 영어를 잘하는 이들과 친하게 지냈으며, 특히 이화여대 영문과 교수이자 이기붕(李起鵬)의 부인이었던 박마리아(朴瑪利亞)와는 절친한 사이였다.
1949년 5월부터 대한부인회 총재를 맡았으나 1953년 10월에 모든 공직에서 사퇴했다. 1952년에 이화여대에서 명예법학박사학위를 받았으며 1955년에는 중앙대학교에서 명예법학박사학위를 받았다.
1960년 5월에 이승만과 더불어 하와이로 망명해 1965년 7월에 이승만이 사망할 때까지 함께 생활했다. 1965년 9월부터 고국인 오스트리아 빈으로 거처를 옮겨 이승만의 기일 때마다 한국을 방문하는 생활을 하다가 1970년 5월에 한국으로 귀국해 이화장(梨花莊)에서 양아들인 이인수(李仁秀)의 가족과 더불어 생활했다.
1992년 3월에 노환으로 사망했으며 국립묘지 이승만 대통령 묘역에 합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