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길(崔鍾吉)은 1931년 4월 28일 충청남도 공주에서 태어났다. 1951년 인천 제물포고등학교를 거쳐 1955년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였다. 1957년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원 석사과정을 졸업하였고, 같은 해 스위스 취리히대학교에서 유학하였다. 1958년 독일 쾰른대학교로 옮겨 1961년에 법학 박사학위(민사법 전공)를 취득하였다. 1964년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교수로 임용되었고, 1967년부터 1969년까지는 서울대학교 학생과장을 맡았다. 1970년부터 1972년 3월까지는 미국 하버드대학교 로스쿨에서 방문교수로 체류하였으며, 그 후 서울대학교로 복귀하여 교수로 재직하였다.
최종길은 1973년 10월 16일 중앙정보부(지금의 국가정보원)의 소환 조사 요청에 응하여 남산 분청사에 출두하였다가 조사 3일 만인 10월 19일 새벽에 중앙정보부 건물 앞에서 담당 수사관에 의해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1973년 10월 25일 중앙정보부는 동서 유럽을 거점으로 한 간첩단 54명을 적발하였다는 사실을 발표하면서 최종길 교수가 이 간첩단의 일원이며, 조사 과정에서 간첩 사실을 자백한 후 화장실 창문으로 투신자살하였다고 밝혔다. 이날 중앙정보부는 최종길이 1958년 당시 서독 쾰른대학에서 유학 생활을 하던 중 프랑스 주재 북한 공작원인 노봉유에게 포섭되어 동독에서 간첩 교육을 받고, 1960년 6월 동독을 경유하여 북한으로 가서 노동당에 입당하여 공작금 2천 달러를 받고 귀환한 간첩이라고 발표하였다.
이와 같은 중앙정보부의 발표 내용에 대해서는 지속적으로 의문이 제기되었다. 1974년 12월 10일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과 한국천주교정의평화위원회는 인권 문제를 환기하는 성명서에서 최종길 교수의 죽음은 자살이 아니라 고문치사라고 주장하였다. 1988년 10월 6일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은 최종길 교수 사인 진상의 규명을 요구하며 당시 중앙정보부장 이후락 등 22명의 사건 관련자를 서울지방검찰청에 고발하였다. 이 사건의 공소시효가 만료되는 1988년 10월 18일에 검찰은 “최 교수가 타살되었다는 증거도, 자살하였다는 증거도 찾아내지 못하였다.”라고 발표하였다.
2002년 5월 27일 대통령 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최종길 사망 사건 직후 중앙정보부가 (1) 송치서류를 허위로 작성하고 간첩 자백 사실을 조작하였으며, (2) 현장검증을 조작하였고, (3) 부검에 부당하게 개입하였고, 부검감정서 원본을 가져가려 시도하였으며, (4) 감찰실에서 수사관들의 고문 사실을 축소 · 은폐 · 조작하였으며, (5) 유럽 거점 대규모 간첩단 사건을 조작하였다는 사실 등을 밝혔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최종길이 중앙정보부 수사관들의 고문이라는 위법한 공권력에 의하여 사망하였다고 결론을 내렸고, 그의 죽음이 민주화운동과 관련된다는 사실을 인정하였다.
2006년 서울고등법원은 최종길 교수 유족들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청구사건에 대해 국가가 국민 보호 의무를 위반하여 원고들이 피해를 보았으므로, 그 손해를 배상할 책임이 있다는 판결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