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일순(張壹淳)은 1928년 10월 16일 강원도 원주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인동(仁同), 호는 호암(湖岩) · 청강(靑江) · 무위당(无爲堂) · 일속자(一粟子)이다. 어린 시절 조부 장경호에게 한학을 배웠으며, 유인석 휘하에서 의병운동에 참여하였던 차강(此江) 박기정(朴基正) 서화가에게서 한문과 서예를 익혔다. 1940년 원주소학교를 졸업한 뒤 서울 배재중학교에 입학하였다. 1945년 경성공업전문학교에 입학하였으나, 1946년 미군정의 ‘국립대학 설립안에 반대하는 운동’( 국대안반대운동)에 참여하였으며, 1947년 ‘국대안반대운동’의 주요 참여자로 지목되어 제적되었다. 제적당한 후 원주에서 지내다가 서울대학교 미학과에 입학하였으나, 1950년 한국전쟁 발발로 군에 입대하여 거제 포로수용소 통역관으로 근무하기도 하였다.
1954년 대성중 · 고등학교를 설립하여 대성학원 이사장을 지냈고, 1966년 원주 신용협동조합 초대 이사장을 맡았다. 1973년 재해대책사업위원회 설립과 1983년 농산물 도농 직거래 조직인 ‘ 한살림’ 창립에 참여하였다. 1994년 5월 22일 67세에 사망하였다.
장일순은 한국전쟁 중 아인슈타인이 주장하는 세계연방정부운동(원월드운동)에 동참하여 아인슈타인과 편지를 주고받았다. 1958년 민의원 선거에 원주 지역 무소속으로 입후보하였으나 낙선하였고, 1960년 제5대 국회의원 총선거(7 · 29총선)에서 사회대중당 후보로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5 · 16군사쿠데타 직후 중립화 평화통일론을 주장한 것이 빌미가 되어 3년간 옥고를 치렀다.
천주교 원주교구 초대 교구장이 되어 1965년 원주성당에 온 지학순 주교와 함께 1966년부터 원주 지역 신용협동조합운동을 시작하였다. 1969년 10월에는 교구 부설 진광중학교에 ‘협동교육연구소’를 설립하였다.
1972년 8월 발생한 남한강 대홍수 피해 구호 과정에서 원주교구가 주축이 되어 1973년 1월 재해대책사업위원회를 구성하였는데, 장일순은 이 위원회의 설립과 운영에 깊이 간여하였다. 장일순은 생명 간의 협동과 공생을 중시하며 지역 협동조합운동을 확대 발전시켜 나갔다.
1974년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사건(민청학련사건)의 배후 인물로 지목되어 김지하와 지학순 주교가 구속되자, 천주교 사제들과 신도들이 시국기도회를 개최하였다. 장일순은 신도들과 함께 지학순 · 김지하 석방 운동을 전개하였으며, 원주 지역에서의 반유신 민주화운동에 참여하였다.
1977년부터 장일순은 생명운동(사상)으로의 전환을 역설하기 시작하였다. 그의 생명운동 실천 방식은 생활협동조합운동이었고, 1983년 ‘한살림’ 창립으로부터 본격화되었다. 1985년 6월 24일 전국 최초의 한살림 조직인 원주소비자협동조합 설립에 참여하였고, 1989년 10월 29일 ‘한살림모임’의 창립과 이날 발표된 ‘한살림선언’ 준비에도 참여하였다. 1991년 지방자치제 선거를 앞두고 시민운동 단체와 생명운동 진영이 연대하여 발족한 '참여와 자치를 위한 시민연대회의'에 고문직을 맡기도 하였다.
2007년 원주 밝음신협에 무위당기념관이 개관되었다. 2010년 장일순의 삶과 사상을 계승하려는 이들이 ‘사단법인 무위당사람들’을 창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