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일순 ()

현대사
인물
대한민국의 시민운동가, 사회운동가, 서화가, 교육가로, 1960~1970년대 강원도 원주 지역 협동조합운동을 주도하였고, 1970년대 후반 이후 생명운동을 제창한 인물.
이칭
호암(湖岩), 청강(靑江), 무위당(无爲堂), 일속자(一粟子)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928년 10월 16일
사망 연도
1994년 5월 22일
본관
인동(仁同)
출생지
강원도 원주
주요 저서
나락 한 알 속의 우주
주요 경력
대성학원 이사장
관련 사건
국대안반대운동
내용 요약

장일순은 대한민국의 사회운동가로, 1960~1970년대 강원도 원주 지역 협동조합운동을 주도하였고, 1970년대 후반 이후 생명운동을 제창한 인물이다. 천주교 원주교구 지학순 주교와 함께 원주 지역 신용협동조합·생활협동조합 등의 설립을 주도하며 지역 운동에 헌신하였고, 1970년대 반독재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생명운동으로의 패러다임 전환을 주장하며 1983년 '한살림' 창립에 기여하는 등 협동조합운동과 생명운동 확산에 공헌하였다.

정의
대한민국의 시민운동가, 사회운동가, 서화가, 교육가로, 1960~1970년대 강원도 원주 지역 협동조합운동을 주도하였고, 1970년대 후반 이후 생명운동을 제창한 인물.
가계 및 인적 사항

장일순(張壹淳)은 1928년 10월 16일 강원도 원주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인동(仁同), 호는 호암(湖岩) · 청강(靑江) · 무위당(无爲堂) · 일속자(一粟子)이다. 어린 시절 조부 장경호에게 한학을 배웠으며, 유인석 휘하에서 의병운동에 참여하였던 차강(此江) 박기정(朴基正) 서화가에게서 한문과 서예를 익혔다. 1940년 원주소학교를 졸업한 뒤 서울 배재중학교에 입학하였다. 1945년 경성공업전문학교에 입학하였으나, 1946년 미군정의 '국립대학 설립안에 반대하는 운동'( 국대안반대운동)에 참여하였으며, 1947년 ‘국대안반대운동’의 주요 참여자로 지목되어 제적되었다. 제적당한 후 원주에서 지내다가 서울대학교 미학과에 입학하였으나, 1950년 한국전쟁 발발로 군에 입대하여 거제 주1 통역관으로 근무하기도 하였다.

1954년 대성중 · 고등학교를 설립하여 대성학원 이사장을 지냈고, 1966년 원주 신용협동조합 초대 이사장을 맡았다. 1973년 재해대책사업위원회 설립과 1983년 농산물 도농 직거래 조직인 ‘ 한살림’ 창립에 참여하였다. 1994년 5월 22일 67세에 사망하였다.

주요 활동

장일순은 한국전쟁 중 아인슈타인이 주장하는 세계연방정부운동(원월드운동)에 동참하여 아인슈타인과 편지를 주고받았다. 1958년 민의원 선거에 원주 지역 무소속으로 입후보하였으나 낙선하였고, 1960년 제5대 국회의원 총선거(7 · 주2)에서 사회대중당 후보로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5 · 16군사쿠데타 직후 중립화 평화통일론을 주장한 것이 빌미가 되어 3년간 옥고를 치렀다.

천주교 원주교구 초대 교구장이 되어 1965년 원주성당에 온 지학순 주교와 함께 1966년부터 원주 지역 신용협동조합운동을 시작하였다. 1969년 10월에는 교구 부설 진광중학교에 ‘협동교육연구소’를 설립하였다.

1972년 8월 발생한 남한강 대홍수 피해 구호 과정에서 원주교구가 주축이 되어 1973년 1월 재해대책사업위원회를 구성하였는데, 장일순은 이 위원회의 설립과 운영에 깊이 간여하였다. 장일순은 생명 간의 협동과 공생을 중시하며 지역 협동조합운동을 확대 발전시켜 나갔다.

1974년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사건(민청학련사건)의 배후 인물로 지목되어 주3와 지학순 주교가 구속되자, 천주교 사제들과 신도들이 시국기도회를 개최하였다. 장일순은 신도들과 함께 지학순 · 김지하 석방 운동을 전개하였으며, 원주 지역에서의 반유신 민주화운동에 참여하였다.

1977년부터 장일순은 생명운동(사상)으로의 전환을 역설하기 시작하였다. 그의 생명운동 실천 방식은 생활협동조합운동이었고, 1983년 '한살림' 창립으로부터 본격화되었다. 1985년 6월 24일 전국 최초의 한살림 조직인 원주소비자협동조합 설립에 참여하였고, 1989년 10월 29일 ‘한살림모임’의 창립과 이날 발표된 ‘한살림선언’ 준비에도 참여하였다. 1991년 지방자치제 선거를 앞두고 시민운동 단체와 생명운동 진영이 연대하여 발족한 '참여와 자치를 위한 시민연대회의'에 고문직을 맡기도 하였다.

학문과 저술 · 사상과 작품

장일순은 해월 최시형주4과 노자철학의 많은 영향을 받았다. 1993년 『 도덕경』을 주5의 관점에서 풀이한 『장일순의 노자 이야기』를 이현주 목사의 도움으로 출간하였다. 사후 3년 뒤인 1997년에는 녹색평론사에서 강연, 대담 등을 모은 『나락 한 알 속의 우주』라는 책을 펴냈다. 그는 서화에도 능하여 많은 작품을 남겼다. 서화 중에는 난초 그림이 많고, 그중에서도 난에 사람의 얼굴을 담는 ‘얼굴 난초’가 유명하다.

상훈과 추모

2007년 원주 밝음신협에 무위당기념관이 개관되었다. 2010년 장일순의 삶과 사상을 계승하려는 이들이 ‘사단법인 무위당사람들’을 창립하였다.

참고문헌

단행본

이용포, 『무위당 장일순』(작은씨앗, 2011)
최성현, 『좁쌀 한알 장일순』(도솔, 2004)

논문

이나미, 「1980년대 비판과 대안의 한국정치사상: 리영희, 박현채, 문익환, 장일순을 중심으로」(『정치사상연구』 25-1, 한국정치사상학회, 2019)
강창선, 「한국의 생명운동과 대안 정치운동- 무위당 장일순을 중심으로」(고려대학교 대학원 정치외교학과 박사학위 논문, 2015)
주석
주1

1950년에 경상남도 거제도 일대에 설치되었던 포로수용소. 6ㆍ25 전쟁 중 북한군과 중공군 포로들이 수용되었고, 1953년에 반공 포로는 석방되고 친공 포로는 북으로 송환되면서 폐쇄되었다. 1983년에 경상남도 문화재 자료로 지정되었다.    우리말샘

주2

제2공화국 때인 1960년 7월 29일 민의원과 참의원으로 나누어 실시한 국회의원선거.    바로가기

주3

시인이자 생명운동가. 1970년대 내내 민족문학의 상징이자 유신 독재에 대한 저항운동의 중심으로서 도피와 유랑, 투옥과 고문 등 형극의 길을 걸어온 작가이다. 아시아·아프리카작가회의로부터 로터스상 등을 받았다.    바로가기

주4

19세기 중엽에, 교조(敎祖) 최제우가 주장한 우리나라 고유의 종교 철학 사상. 봉건적 착취와 압박, 외세의 침략에서 벗어나려는 농민, 수공업자 들을 비롯한 백성의 요구를 일정하게 반영하여 발생하였다.    우리말샘

주5

1980년 출옥 이후 ‘생명’이라는 화두를 던진 시인 김지하(金芝河)의 사상. 김지하는 서구적 휴머니즘의 한계를 지적하며, 우주 만물에 깃든 생명을 모셔야 참생명의 후천 시대가 열릴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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