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대중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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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에 창당되었던 정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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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1960년에 창당되었던 정당.
내용

구진보당계·민주혁신당계·민족자주연맹·민주사회당계 등의 혁신계열이 결집하여 4·19혁명 이후 1960년에 창당하였다. 이승만정권(李承晩政權)의 탄압을 받아 자유로운 정치활동을 못하였던 혁신정치세력은 4·19혁명 이후 사회 전면에 나오게 되었다.

12년 동안의 이승만정권의 탄압은 혁신세력을 완전 지리멸렬한 상태로 몰아넣었고, 새로운 세력의 집결도 거의 불가능한 상태였다. 그 결과 자유당정권이 붕괴되어도 갑자기 성장할만한 기틀이 없었고, 또 여러 갈래의 혁신계가 나와서 통일된 세력을 이루기가 어려웠다.

그 가운데서도 사회대중당은 이념과 노선이 일치하는 구진보당계·민주혁신당계·근로인민당계·민족자주연맹계·민주사회당계가 중심이 되어 1960년 5월 13일 발기인 모임을 갖고 “4월민주혁명은 명실상부한 참다운 민주혁명이어야 한다. 이 민주혁명을 통하여 국민의 주권은 튼튼히 확립되어야 하고, 민주적 자유와 인권은 완전히 보장, 실현되어야 하며, 이 혁명을 계기로 하여 참다운 민주적 복지사회에로의 거대한 전진이 이룩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발기취지문을 발표하였다.

이어 6월 17일 시내 삼일당에서 창당준비위원 대표자대회를 열어 집단지도체인 총무위원회를 두고, 대표총무위원에 서상일(徐相日), 간사장에 윤길중(尹吉重)을 선출하였다. 7·29총선거에 임하여 민의원에 129명과 참의원에 6명의 후보를 공천하여 민의원에 4명, 참의원에 1명이 당선되었다.

총선거가 끝난 뒤 진보당계의 김달호파(金達鎬派)와 비진보당계간에 분열이 일어나 윤길중·송남헌(宋南憲) 등 중도파의 중재에도 극복되지 못하고, 9월 1일 비진보당계의 결별선언으로 완전히 진보당계와 비진보당계로 갈라졌다. 진보당계의 사회대중당도 김달호계와 기타 세력 사이에 의견 조절이 되지 않아 김달호계만 11월 24일 사회대중당 결당식을 거행하였다.

사회대중당 발기당시의 임원을 보면, 대표총무위원에 서상일, 간사장에 윤길중, 총무위원에 이동화(李東華)·이훈구(李勳求)·김성숙(金星淑)·정화암(鄭華巖)·송남헌·조헌식(趙憲植)·박기출(朴己出)·김달호·유병묵(劉秉默)·김기철(金基喆), 통제위원장에 최근우(崔謹愚), 통제부위원장에 이명하(李明河), 당무위원회 위원장에 송남헌, 조직위원장에 김기철, 선전위원장에 유병묵, 재정위원장에 구익균(具益均), 선거대책위원장에 조헌식, 인권옹호위원장에 장홍염(張洪琰), 기획위원장에 이동화, 국토통일위원장에 박노수(朴魯洙)가 임명되었다. 그러나 5·16군사정변 직후인 1961년 5월 22일 <국가재건최고회의의 포고> 제6호에 의하여 해산되었다.

참고문헌

「사회대중당창당발기문헌(社會大衆黨創黨發起文獻)」
『해방30년사(解放30年史)』3(이정식, 성문각, 1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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