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순직은 제6·7·14대 국회의원을 역임하였으며, 3선개헌을 반대하고 민주화운동에 참여한 정치인이다. 1925년 충청남도 논산군에서 태어났다. 1958년 해군본부 정훈차감을 지냈고, 1962년에는 서울신문 사장을 역임하였다. 1963년과 1967년 민주공화당 소속으로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1969년 3선개헌에 반대하여 민주공화당에서 제명되었으며, 1979년에는 YWCA 위장결혼식 사건으로 체포되었다. 1980년대에는 신한민주당, 통일민주당 부총재를 역임하였고,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상임 대표로 6월민주항쟁을 주도하였다.
1925년 5월 11일 충청남도 논산군에서 태어났다. 호는 심산(心山)이다.
공주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49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교육학과를 졸업하였다. 졸업 직후 해군 소위로 임관하여 1958년 해군본부 정훈차감이 되었다. 5·16군사쿠데타가 일어난 1961년에 예비역으로 편입하였고, 이듬해인 1962년 서울신문 사장이 되었다. 1963년 총선에서 민주공화당의 공천을 받아 충청남도 논산군에서 제6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1967년 총선에서도 민주공화당 소속으로 같은 지역에서 제7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1965년부터 1969년까지 국회 재경위원장을 맡았다.
1969년 소위 4·8항명으로 3선개헌에 반대하여 예춘호, 박종태, 정태성, 김달수 의원과 함께 민주공화당에서 제명되었다. 1971년 1월 8일 양순직과 예춘호는 복당하였으나, 1974년 12월 28일에 "오늘날과 같이 자유가 억압당하고 기본권이 유린될 때 국가의 안보나 안전도 얻을 수 없다는 것이 나의 소신"이라며 민주공화당을 탈당하였다. 1978년 민주회복국민회의에 참여하였고, 민주헌정동지회 결성에도 참여하였다. 1979년 YWCA 위장결혼식 사건으로 구속되어 1년간 복역하였다.
1980년 정치 활동 규제에 묶였다가 1984년에 해금되었다. 1985년 민주헌정연구회 조직에 참여하여 지도위원을 맡았고, 민주화추진협의회 상임운영위원을 맡았다. 1985년 8월 신한민주당 부총재가 되었고, 1987년 4월 김영삼, 김대중과 함께 신한민주당을 탈당하여 통일민주당을 창당하고 부총재를 맡았다. 1987년 5월 27일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결성식에 발기인으로 참여하였고, 상임대표를 맡아 6·10대회 조직을 주도하였다. 양순직 등 국민운동본부 간부 13명은 6월민주항쟁의 기점이 된 6·10대회를 주도한 혐의로 구속되었다.
1987년 10월 29일 통일민주당을 탈당하였고, 김대중의 평화민주당 창당에 참여하여 부총재를 맡았다. 1992년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의 통일국민당에 합류하여 전국구 후보로 당선되어 제14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1993년 통일국민당을 탈당하며 무소속 의원이 되었다가, 1994년 박찬종, 김동길이 참여한 신민당에서 최고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95년에는 자유민주연합으로 옮겨 상임고문을 맡았고, 1998년에 한국자유총연맹 제7대 총재와 제2건국위원회 공동위원장을 맡았다.
회고록 『대의는 권력을 이긴다』를 저술하여 2002년에 발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