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주영은 자신의 막강한 재력을 수단으로 대통령이 되어 보겠다는 야망을 실현하기 위해 1991년 말부터 정당 창당을 추진하였다. 그는 1992년 1월 통일국민당(약칭 국민당) 창당준비위원장에 선출되었고, 곧이어 대학교수 출신인 김동길(金東吉)이 추진중이던 새한당을 흡수하였다.
정주영은 1992년 2월 초 창당대회를 개최하여 통일국민당을 정식으로 출범시켰다. 국민당은 1992년 3월에 실시된 국회의원선거에서 정주영의 막강한 재력에 힘입어 지역구 24명, 전국구 7명, 모두 31명의 당선자를 배출하는 큰 성공을 거두었다. 정주영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성공한 여세를 몰아 1992년 12월 대통령선거에 국민당 후보로 입후보하였다.
그는 대통령선거에서 많은 돈을 선거자금으로 투입하였으나 대통령선거 총투표인 수 가운데 16.3%밖에 표를 얻지 못하였다. 대통령선거에서 패배한 뒤, 정주영은 집권세력인 김영삼(金泳三) 정권에게서 탄압을 받았다. 그는 대통령선거법과 특정경제가중처벌법을 위반한 혐의로 기소되었으며, 현대그룹의 기업들은 검찰수사 및 세무조사를 받았다.
탄압을 견디지 못한 정주영은 1993년 2월 전국구 의원직을 사퇴하고 정계은퇴를 선언하면서 더 나아가 자기가 만든 당까지 해체하려고 노력하였다. 정주영은 그가 끌어들인 국회의원들에게 국민당을 탈당하도록 사주하였고, 자기가 제공한 국민당의 당사를 폐쇄하였다.
정주영의 노력에 따라 다수의 국민당 소속 국회의원들이 탈당하였다. 국민당에 잔류한 정치인들은 김동길을 당대표로 선출하고 그를 중심으로 당을 재건하려 하였다. 그러나 정주영의 재력(財力)에 의해 만들어진 정당에 자금이 공급되지 않고 당사마저 사라져 당의 유지조차 곤란해졌다.
1993년 여름 새로 집권한 김영삼 정권이 집권당 내의 노태우(盧泰愚) 세력에 대한 숙청을 전개하는데 반발하여 집권당을 탈당한 박철언(朴哲彦)·김복동(金復東) 등 소수의 대구·경북 지역 출신 국회의원들이 국민당에 합류하였다. 그들의 합류에도 불구하고 국민당은 국회에서 원내 교섭단체를 구성할 수 없는 빈약한 당세에 머물렀다.
당 사무실을 이곳저곳으로 옮기며 정당으로서의 명맥을 간신히 유지해 온 국민당은 다른 정당과의 합당을 통해 활로를 개척하려고 모색하였다. 국민당의 대표 김동길은 군소정당(群小政黨)의 하나인 신정치개혁당(약칭으로 신정당)의 대표 박찬종(朴燦鍾)과 합당교섭을 전개하여 1994년 5월 두 정당이 통합할 것을 합의하였다. 그러한 합의에 따라 두 정당은 1994년 7월 통합전당대회를 개최하고 신민당이라는 새로운 정당을 창당하였다. 이로써 국민당은 창당 2년 반 만에 소멸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