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5년 11월 25일 강원도 통천군 송전리 아산마을에서 정봉식(鄭捧植), 한성실(韓成實)사이의 6남 2녀 중 장남으로 출생했다. 호는 고향 마을 이름을 딴 아산(峨山)이다. 1930년 송전소학교 졸업이 최종학력이었으며, 이후 농업에 종사했던 아버지를 따라 농사를 지었다. 가난을 벗어나기 힘들어 수차례 가출을 반복하면서 농업 대신 다른 직업을 찾고자 하였다.
원산 지역 철도공사장에서 막노동을 비롯하여, 이후 4번의 가출 끝에 서울에서 미곡상에 취직했다. 1937년 쌀가게를 물려받아 운영하다 전시 통제경제로 문을 닫고, 1940년 아도서비스라는 자동차 수리공장을 운영했으나 이 역시 1942년 기업정리령에 따라 폐업하였다. 이후 광산 관련 사업을 하다 해방을 맞이하였다.
해방 후 1946년 4월 현대자동차공업사를 설립하였고, 1947년 5월에는 현대토건사를 설립하여 건설업으로도 진출하였다. 1950년에는 두 회사를 합병하여 현대그룹의 모태 격인 현대건설주식회사를 설립하였다. 한국전쟁의 발발로 위기를 맞았으나 미군 통역장교였던 동생 정인영의 도움으로 미군 관련 건설공사를 수주하게 되었고, 서울 수복 이후에는 거의 독점하다시피하여 사업의 토대를 다졌다.
이후 전후 복구 사업에 참여하여 한강 인도교 복구, 제1한강교 복구, 인천 제1도크 복구 등의 사업을 수주하면서 사업 규모를 키워 1960년에는 국내 건설업체 중 도급한도액 1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1964년에는 건설업과 밀접한 관련이 있던 시멘트 공장을 준공하였고 1965년에는 국내 최초로 태국의 고속도로 건설 사업에 참여하였다. 1970년대에는 중동 건설 붐을 타고 사세를 크게 확장하였으며 울산 조선소 건설, 서산지구 간척 사업 등을 추진하여 국내 대표적인 건설사로 성장했다.
한편 1967년에는 현대자동차주식회사를 설립하여 자동차 산업에 뛰어들었고, 1971년 현대그룹 회장으로 취임하였다. 1973년에는 박정희 체제의 중화학공업화 전략에 따라 현대조선중공업주식회사를 설립하였고, 1975년 4월에는 현대미포조선주식회사를 설립하였다. 1983년에는 현대전자산업주식회사를 설립하면서 전자 업종으로도 진출하였다.
이후 국내 굴지의 재벌집단으로 성장하면서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19771987), 서울올림픽 유치위원장(1981), 대한체육회장(19821984) 등을 역임하면서 사회활동도 활발하게 진행하였다. 1977년에는 아산사회복지재단을 만들었다.
한편 1987년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되면서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고 1990년대 들어서는 기업활동 보다 정치활동 및 남북협력사업에 치중했다. 1992년 통일국민당을 창당해 대표 최고위원에 취임하고, 제14대 국회의원에 당선됨으로써 본격적인 정치활동을 시작하였다. 그해 12월 치러진 제14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하였고, 1993년 2월 통일국민당 탈당과 함께 국회의원을 사퇴하면서 모든 정치활동을 정리하였다.
1998년에는 두 차례에 걸쳐 소 1000여 마리를 몰고 판문점을 통해 방북해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면담을 하는 등 남북협력사업에 치중했다. 그 영향으로 1998년 금강산 관광 사업을 성사시켜 큰 주목을 끌기도 하였다.
2000년 5월 현대그룹 명예회장직을 사퇴한 후에는 일명 ‘왕자의 난’으로 불린 경영권 분쟁이 발생해 그룹이 분할되는 사태를 빚기도 했다. 2001년 폐렴으로 인한 급성 호흡부전증으로 사망했다.
상훈으로는 제1회 한국경영대상(1987), 국민훈장 무궁화장(1988), IOC훈장(1998), 노르웨이 왕실훈장(1998)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