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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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사
제도
임금 또는 왕족이 죽은 뒤에 존호(尊號)를 올리던 제도.
이칭
이칭
추존(追尊)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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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임금 또는 왕족이 죽은 뒤에 존호(尊號)를 올리던 제도.
내용

역사상 그 유형은 몇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신라에서 볼 수 있는 갈문왕(葛文王)이고, 둘째는 신라 중대의 오묘제(五廟制)로서 왕의 부계(父系)와 시조에서 대왕(大王)의 호를 올린 것이고, 셋째는 새로운 왕조의 창건에 따른 4대조의 추존(追尊)이며, 넷째는 조선시대의 방계(傍系)에서 나온 왕의 사친(私親)을 대원군(大院君)으로 높인 것 등이다.

  1. 갈문왕

갈문왕에 대해서는 『삼국사기』에 추봉한 왕을 모두 갈문왕이라 하나 그 뜻은 상세하지 않다고 하였다. 그 동안 갈문왕에 대해서는 많은 연구가 나왔다.

대체로 왕위계승권이 없는 준왕(準王)과 같은 존재로서 왕의 아버지, 왕비의 아버지, 왕의 동생이 주로 책봉되고, 특수한 경우 왕비족과 왕모족 또는 여왕의 배우자가 갈문왕으로 책봉되는 등 다양한 양상을 띠고 있었다. 이를 좀 더 자세하게 살펴보면, 시대적으로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초기의 박씨왕시대(朴氏王時代)에는 왕비의 아버지, 즉 왕비족인 김씨족(金氏族)의 장(長)이 갈문왕에 책봉되었다. 뒤에 석씨(昔氏)와 김씨가 왕위에 올라 형제상속이 행해지면서 왕의 아버지가 갈문왕에 책봉되었다.

내물마립간 이후 김씨의 세습왕권이 확립되고 차차 왕위의 부자상속이 이루어지게 되면, 왕위계승권자의 지위에서 밀려난 왕의 동생이 갈문왕으로 책봉되는 것이 지배적이었다.

한편, 이에 준하는 왕비나 왕모 또는 특수한 경우에는 여왕의 배우자의 씨족 또는 가계의 장들도 갈문왕에 책봉되었다. 이는 김씨왕족의 가계를 중심으로 한 여러 지배귀족의 연합을 잘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태종무열왕계의 전제왕권이 확립되는 중대가 되면, 갈문왕제는 사라지고 왕의 부계에 대한 대왕의 추봉이 있었으며, 하대에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하대에 속하는 희강왕의 비 문목부인(文穆夫人)의 아버지 충공(忠恭)이 갈문왕으로 추봉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이례적인 것으로서 상대의 갈문왕 추봉의 전통이 중대에 아주 소멸되지 않고 잔존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신라 하대에는 왕의 아버지·할아버지·증조부·고조부뿐만 아니라 왕의 아버지나 왕의 외할아버지, 그리고 여왕의 배우자도 대왕으로 추봉되었다. 한편, 갈문왕과 대왕의 추봉시에는 왕의 어머니를 비롯해 여러 할머니도 태후(太后)·왕후(王后) 등으로 추봉되었다.

  1. 오묘제

오묘제는 687년(신문왕 7)에 신문왕이 전제왕권의 강화를 위한 시책의 하나로서 5대조, 즉 태조대왕·진지대왕·문흥대왕(文興大王 : 태종무열왕의 아버지 김용춘)·태종대왕·문무대왕을 조묘(祖廟)에 모시고 제사지낸 것에서 비롯한다.

여기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갈문왕 대신 대왕의 존호가 등장하는 점이다. 원래 김씨왕조가 시조강탄지인 나을(那乙)에 신궁(神宮)을 건립하고 미추이사금을 시조로 모신 것은 소지마립간 또는 지증마립간 때의 일이다.

시조묘(始祖廟)가 박혁거세(朴赫居世)를 주신(主神)으로 모신데 대해 신궁은 김씨 왕조의 시조인 미추이사금을 주신으로 모신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하여 중대 말인 혜공왕 때 『삼국사기』 제사조(祭祀條)의 기록을 보면, 미추대왕은 김성(金姓)의 시조가 되고, 태종대왕·문무대왕은 백제와 고구려를 평정한 큰 공덕이 있기 때문에 모두 세세불천(世世不遷)의 신위(神位)로 삼고, 거기에 친묘 2위, 즉 경덕대왕·신덕대왕을 합하여 처음으로 오묘제를 정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신문왕 때 이미 오묘제가 성립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리고 신문왕 때 태조대왕이라 한 것은 곧 김씨왕조의 창업주인 미추대왕을 가리킨 것이다. 그러므로 중대를 개창한 무열왕의 묘호인 태종은 실로 미추태조를 의식하여 이에 대응하는 개념으로서 추봉한 것으로 볼 수 있다.

  1. 왕조창건에 따른 4대조 추봉

새 왕조를 개창한 창업주의 4대조를 추봉하는 것으로, 이는 고려에서부터 찾아볼 수 있다. 고려는 처음부터 중국과 같은 묘호를 사용하여 창업지주(創業之主)를 ‘태조’, 수성지군(守成之君)을 ‘종(宗)’으로 하였다.

이는 왕조의 자존의식과 권위를 한껏 발휘한 것으로 평가된다. 고려는 왕 스스로를 짐(朕), 왕명을 조(詔), 왕위계승자를 태자(太子)라 하고, 또 폐하(陛下)와 같은 자주적인 용어를 썼다. 한편, 삼국시대처럼 시호로서 대왕이라는 칭호도 병용하였다. 또한 천수(天授)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기도 하였다.

태조 왕건(王建)은 즉위 다음해에 3대조를 추봉하여 증조부를 시조원덕대왕(始祖元德大王)으로, 할아버지를 의조경강대왕(懿祖景康大王)으로, 아버지를 세조위무대왕(世祖威武大王)으로, 증조모를 정화왕후(貞和王后)로, 할머니를 원창왕후(元昌王后)로, 어머니를 위숙왕후(威肅王后)로 높였다.

그 뒤, 대대의 왕도 『고려사』에 보이는 것처럼 묘호와 시호로 태조신성대왕(太祖神聖大王) 또는 혜종의공대왕(惠宗義恭大王) 등으로 추숭(推崇)하였다.

이를 당나라와 비교해볼 때, 당나라는 개국 후 곧 할아버지와 아버지 2대를 추존하고, 그 뒤 고종 때 다시 증조·고조를 추존함으로써 결국 4대를 황제로 봉한 반면, 고려가 왜 3대만 추봉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고려 후기에 몽고의 간섭을 받아 자주성을 크게 상실한 충렬왕 때부터는 묘호인 종과 시호인 대왕의 존호가 기록에서 사라지고, 시호로서의 충렬왕이라는 왕호만 추증하게 된다.

양반사회에 있어서 4대조를 제사지내고 벼슬을 추증하는 습속이 일반화되기 시작한 것은 고려 말에 주자학을 수용하며 주자의 『가례(家禮)』를 신봉하면서부터이다. 그 대표적인 사례는 공양왕이 신종의 7대손으로서 방계에서 왕위에 올라 곧 4대를 추봉한 것이다.

조선도 개국 후, 곧 고려의 실례를 본받아 4대조를 추봉해 목왕(穆王)·익왕(翼王)·도왕(度王)·환왕(桓王)이라 하였다. 그 후, 다시 묘호와 시호를 병용해 목조인문대왕(穆祖仁文大王)·익조강혜대왕(翼祖康惠大王)·도조공의대왕(度祖恭毅大王)·환조연무대왕(桓祖淵武大王)이라 추존하였다.

한편, 4대조모도 효공왕후(孝恭王后)·정숙왕후(貞淑王后)·경순왕후(敬順王后)·의혜왕후(懿惠王后)로 추봉하였고, 이들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과 딸도 대군(大君)과 공주(公主)로 높였다.

그리고 창업주인 태조와 대대의 왕도 묘호인 조·종과 시호인 대왕을 같이 추존하였다. 가령 태조는 강헌대왕(康獻大王), 세종은 장헌대왕(莊憲大王)이라 추숭하였다. 그러나 고려시대처럼 짐·조·태자·폐하 등과 같은 자주적인 용어는 회복하지 못하고 겨우 왕조 말 대한제국이 되어서야 사용하였다.

  1. 대원군

대원군의 칭호는 조선의 제14대 왕인 선조가 명종의 뒤를 이어 방계에서 대통(大統)을 계승하게 되자, 종전에 사친에게 묘호와 대왕의 시호를 올리던 전통을 버리고, 사친 덕흥군(德興君 : 중종의 일곱째 아들)을 대원군으로 추봉한 것이 처음이다.

다음은 제16대 인조의 생부 정원군(定遠君 : 선조의 다섯째 아들)이다. 광해군의 뒤를 이어 왕위를 계승한 인조는 곧 죽은 아버지 정원군을 대원군으로 추존하였다가 1632년(인조 10) 5월에 다시 개봉(改封)하여 묘호를 원종(元宗), 시호를 효장대왕(孝章大王)이라 하였다.

이것으로 보면, 대원군은 대왕보다 격이 낮은 존호임을 알 수 있다. 앞서 선조가 대왕보다 격이 떨어지는 대원군을 선친에게 올린 이유는 알 수 없다.

그 다음은 제25대 철종이 사친 전계군(全溪君 : 사도세자의 손자)을 대원군으로 추봉하였다. 마지막인 고종의 생부 흥선군(興宣君)에 대한 대원군의 칭호는 이미 죽은 아버지에게 올린 것이 아니라 생존한 아버지에게 올린 존호임이 특이하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역사상 대원군이라 하면 흥선대원군을 말하는 것이 보통이다.

참고문헌

『삼국사기(三國史記)』
『삼국유사(三國遺事)』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태조실록(太祖實錄)』
『세종실록(世宗實錄)』
『성종실록(成宗實錄)』
『선조실록(宣祖實錄)』
『인조실록(仁祖實錄)』
『선원계보(璿源系譜)』
「고대삼국(古代三國)의 왕호(王號)와 사회(社會)」(최재석, 『김원룡교수정년기념논총』, 1987)
「신라시대(新羅時代)의 갈문왕(葛文王)」(이기백, 『역사학보(歷史學報)』58, 1973)
「묘제(廟制)의 변천(變遷)을 통(通)하여 본 신라사회(新羅社會)의 발전과정(發展過程)」(변태섭, 『역사교육(歷史敎育)』8, 19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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