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옹은 본피궁에 속해 있었다. 본피궁은 원래 신라 6부(部)의 하나인 본피부의 장(長)이 살던 곳이다. 본피궁은 성격과 기능이 점차 복합화되면서 본피 집단의 정치적 거점이자 농업 · 수공업(手工業) · 광업 등 여러 생산 활동을 하는 경제 기구로 발전하였다.
그러다가 집권체제가 훼부, 사훼부를 중심으로 성립하면서 본피부는 왕경의 행정구역으로 바뀌었으며, 662년(문무왕 2)에 본피궁이 가지고 있던 경제 기반이 해체되었다. 681년(신문왕 원년)에 본피궁이 다시 설치되었는데, 이것은 원래의 본피궁과 달리 내성에 소속되어 왕실 소유의 산림, 하천, 호수 등을 관리하고 수공업 생산을 맡았다. 따라서 공옹은 서기 681년에 처음 제도화된 관직이라고 할 수 있다.
본피궁에는 우(虞) 1명, 사모(私母) 1명, 공옹 2명, 전옹(典翁) 1명, 사(史) 2명이 소속되어 있었다. 본피궁의 으뜸벼슬인 우는 산림천택(山林川澤)에 관한 일, 즉 왕실이 소유한 자연 자원을 관리하는 직무를 맡았으며, 공옹은 왕실 소유의 자원을 이용한 수공업 물품 생산을 관장하던 역할을 수행하였다. 주로 땔나무와 숯 등을 생산하여 공급하는 일을 하였다.
신라에서는 공옹과 더불어 궁옹(宮翁), 간옹(看翁) 등 옹이라 불리던 관원이 내성 예하의 관부에 소속되어 있었다. 이들은 해당 분야의 수공업 업무에 숙련된 관원이었으며, 몇 명의 하급 관원을 거느리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