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육부(六部) 중의 하나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32년(유리이사금 9)에 종래의 육촌(六村) 중의 하나이던 취산진지촌(觜山珍支村)을 개명하여 이에 정씨성(鄭氏姓 : 삼국유사에는 최씨성이라 하였음)을 배정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후대에, 아마도 469년(자비마립간 12)에 서울의 방리(坊里) 명칭을 제정하였을 때 종래의 족제적인 사회조직을 행정조직으로 개편함으로써 나타난 것인 듯하다. 급량부와 사량부에 다음가는 우세한 존재로, 현재의 경주 인왕리일대를 포함하였던 것으로 추측되며, 석씨(昔氏)출신이 중심이 된 조직체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신라가 망한 다음 고려는 940년(태조 23)에 이를 통선부(通仙部)로 고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