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 「죽지랑(竹旨郞)」 조에 "사리(使吏) 간진(侃珍)"이라고 표기되어 있어 성(姓)이나 관등, 관직을 알 수 없다. 간진의 수행원 가운데 진절(珍節)이 있었는데, 진절이 사지(舍知), 즉 경위 13등의 관등 또는 중앙 관부의 하위직인 사지 관직이었으므로, 간진 역시 왕경 출신으로 추정된다.
간진의 활동을 전하는 『삼국유사』의 조항이 " 효소왕대 죽지랑"이라고 되어 있어 마치 효소왕 때 죽지랑과 간진이 활동한 것처럼 되어 있다. 그러나 효소왕대는 죽지랑의 만년 시기로서 죽지랑의 낭도인 득오(得烏)가 「 모죽지랑가(慕竹旨郞歌)」를 지은 시기이고, 부산성(富山城)을 둘러싼 사건이 벌어진 것은 진평왕대였다.
간진도 진평왕 때 주로 활동하였으며, 지금의 경상남도 밀양시에 해당하는 추화군(推火郡)에서 조세로 걷은 능절조(能節租)라는 곡물을 금성 입구의 건천 지역에 있던 부산성으로 수송하는 책임을 맡았다. 간진은 당시 '사리'였으므로 중앙의 관리로서 임시로 수취품의 운송을 책임졌다고 보인다.
부산성에서 창고지기로 일하던 득오의 휴가를 얻기 위해 죽지랑이 노력하는 것을 보고 득오를 사역하던 아간(阿干) 익선(益宣)에게 능절조를 주었으나 허락하지 않자 다시 수행원인 진절의 말안장을 주어 휴가를 얻게 하였다고 한다.
득오를 둘러싼 사건이 조정에 알려지자 진평왕은 간진의 처사를 기려 그 자손이 대대로 평정호손(枰定戶孫)으로서 거주 구역의 업무를 맡게 하였다. 한편, 익선에 대한 처벌로서 그가 속한 모량부 출신 관료를 파직하고 불교 승려가 될 수 없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