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 요약
정의
남북국시대 통일신라 제35대 경덕왕의 왕비.
가계 및 인적 사항
삼모부인의 아버지는 이찬(伊湌) 김순정(金順貞)이다. 김순정에 관해서는 『속일본기(續日本記)』에 성덕왕(재위: 702~737) 25년(726)에 신라 사신이 일본에 가서 김순정이 전년(725)에 죽었음을 알리자, 성무천황(聖武天皇)이 애도하는 조서와 함께 황색 비단과 면(綿)을 보냈다는 기록이 전하는 것으로 보아 당시 대일외교(對日外交)를 주도한 인물로 보인다.
내용
삼모부인의 출궁 후 행적은 경덕왕 13년(754) 황룡사종(皇龍寺鍾) 주조의 시주자로 발견된다. 당시 봉덕사종(奉德寺鍾)을 제작하는 데 황동(黃銅) 12만 근이 들었는데, 황룡사종 제작에는 49만 7581근이 들었다고 하였으니, 수치로만 따지면 황룡사종의 크기가 봉덕사종의 네 배에 해당하는 거대한 불사(佛事)였다. 이 불사에는 효정(孝貞)과 삼모부인이 함께 참여하였다. 효정은 성덕왕 13년(714) 중시(中侍)에 임명된 후 성덕왕 17년(718) 관직에서 물러났는데, 그 후 활동상이 보이지 않다가 황룡사종 주조에 시주자로 등장한 것이다.
두 인물 모두 왕실에서 멀어졌었는데, 이 시기에 이르러 왕실 사찰의 불사에 대시주로 참여한 것이다. 황룡사종 주조를 계기로 효정을 비롯하여 삼모부인과 그를 위시한 세력이 경덕왕의 국정 운영에 영향을 준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삼모부인과 혈연적으로 밀접한 관계였던 김옹(金邕)이 경덕왕 19년(760)에 시중에 임명된 것과 관련하여도 이해할 수 있다. 같은 시기 상대등(上大等)은 신충(信忠)으로, 그는 왕당파(王黨派)로 파악된다. 이렇게 본다면 황룡사종 주조를 전후한 시기에 재등장한 삼모부인과 그의 세력들이 경덕왕의 국정 운영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볼 수 있다.
한편, 황룡사종이 주조된 같은 해에 경덕왕은 대덕(大德) 법해(法海)를 황룡사로 초청하여 『화엄경(華嚴經)』을 강설(講說)하도록 하고, 친히 행향(行香)하였다. 삼모부인은 일찍이 화엄과 연결되어 있어서 황룡사 불사에 참여하였다. 반면에 만월부인은 유가(瑜伽)와 연결되어 있었다. 왕비의 교체는 곧 화엄과 유가가 교차되는 양상을 보여주는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참고문헌
원전
- 『삼국사기(三國史記)』
- 『삼국유사(三國遺事)』
단행본
- 이영호, 『신라 중대의 정치와 권력구조』(지식산업사, 2014)
- 한준수, 『신라중대 율령정치사 연구』(서경문화사, 2012)
- 곽승훈, 『통일신라시대의 정치변동과 불교』(국학자료원, 2002)
- 김수태, 『신라중대 정치사연구』(일조각, 1996)
논문
- 조범환, 「『삼국유사』 왕력편의 異種記事를 통해 본 중대신라의 정치구조-신라 중대 경덕왕의 왕비 교체와 정치적 동향을 중심으로」(『신라사학보』 30, 신라사학회, 2014)
- 이영호, 「통일신라시대의 왕과 왕비」(『신라사학보』 32, 신라사학회, 2011)
- 김지은, 「경덕왕대의 대일외교」(『신라문화』 30, 동국대학교 신라문화연구소, 2007)
- 전덕재, 「신라 중대 대일외교의 추이와 진골귀족의 동향」(『한국사론』 37,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1997)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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