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모부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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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정보
고대사
인물
남북국시대 통일신라 제35대 경덕왕의 왕비.
이칭
별명
사량부인(沙梁夫人)
인물/전통 인물
성별
여성
출생 연도
미상
사망 연도
미상
내용 요약

삼모부인은 남북국시대 통일신라 제35대 경덕왕의 왕비로, 첫 번째 부인이다. 아버지는 이찬 김순정이다. 경덕왕은 삼모부인이 아들을 낳지 못하자 왕비를 폐하고, 사량부인으로 봉한 후에 만월부인을 후비로 맞았다. 삼모부인의 출궁 후 행적은 경덕왕 13년(754) 황룡사종 주조의 시주자로서 발견된다.

정의
남북국시대 통일신라 제35대 경덕왕의 왕비.
가계 및 인적 사항

삼모부인은 신라 제35대 경덕왕(재위: 742~765)의 첫 번째 부인이다. 경덕왕은 삼모부인이 아들을 낳지 못하자 왕비를 폐하고 사량부인(沙梁夫人)으로 봉하였다. 이후 만월부인(滿月夫人)을 후비(後妃)로 맞았는데, 그녀 역시 오랫동안 아들이 없어 결국 승려 표훈(表訓)으로 하여금 천제(天帝)에게 아들을 낳도록 간청하게 하였다. 만월부인이 경덕왕 2년(743)에 후비가 된 것을 보아, 선비(先妃) 삼모부인은 경덕왕이 왕위에 오르기 전 혼인하였음을 알 수 있다.

삼모부인의 아버지는 이찬(伊湌) 김순정(金順貞)이다. 김순정에 관해서는 『속일본기(續日本記)』에 성덕왕(재위: 702~737) 25년(726)에 신라 사신이 일본에 가서 김순정이 전년(725)에 죽었음을 알리자, 성무천황(聖武天皇)이 애도하는 주1와 함께 황색 비단과 면(綿)을 보냈다는 기록이 전하는 것으로 보아 당시 대일외교(對日外交)를 주도한 인물로 보인다.

내용

경덕왕이 삼모부인을 폐한 것은 아들을 낳지 못하였다는 표면적인 이유 이외에 정치세력 간의 대립 때문으로도 설명된다. 즉, 왕당파와 반전제주의적(反專制主義的) 정치세력의 대립이라거나, 외척(外戚) 중심의 국정 운영에 대한 왕권 확립 차원에서 행해진 것으로 보기도 한다. 또한, 김순정과 만월부인의 아버지 김의충(金義忠)을 부자 관계로 보고 안정적인 왕권 유지를 위해 정치적, 경제적 기반이 확고한 귀족 가문과 결합한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한편으로는 삼모부인의 아버지 김순정이 추구한 대일외교 노선이 경덕왕 즉위 후 대당외교(對唐外交)로 변화되었기 때문으로도 파악되는데, 여기에는 김의충이 효성왕(재위: 737~742) 대 대당외교를 담당한 점과도 관련된다.

삼모부인의 출궁 후 행적은 경덕왕 13년(754) 황룡사종(皇龍寺鍾) 주조의 시주자로 발견된다. 당시 주2을 제작하는 데 황동(黃銅) 12만 근이 들었는데, 황룡사종 제작에는 49만 7581근이 들었다고 하였으니, 수치로만 따지면 황룡사종의 크기가 봉덕사종의 네 배에 해당하는 거대한 불사(佛事)였다. 이 불사에는 효정(孝貞)과 삼모부인이 함께 참여하였다. 효정은 성덕왕 13년(714) 중시(中侍)에 임명된 후 성덕왕 17년(718) 관직에서 물러났는데, 그 후 활동상이 보이지 않다가 황룡사종 주조에 시주자로 등장한 것이다.

두 인물 모두 왕실에서 멀어졌었는데, 이 시기에 이르러 왕실 사찰의 불사에 대시주로 참여한 것이다. 황룡사종 주조를 계기로 효정을 비롯하여 삼모부인과 그를 위시한 세력이 경덕왕의 국정 운영에 영향을 준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삼모부인과 혈연적으로 밀접한 관계였던 김옹(金邕)이 경덕왕 19년(760)에 시중에 임명된 것과 관련하여도 이해할 수 있다. 같은 시기 상대등(上大等)신충(信忠)으로, 그는 왕당파(王黨派)로 파악된다. 이렇게 본다면 황룡사종 주조를 전후한 시기에 재등장한 삼모부인과 그의 세력들이 경덕왕의 국정 운영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볼 수 있다.

한편, 황룡사종이 주조된 같은 해에 경덕왕은 대덕(大德) 법해(法海)를 황룡사로 초청하여 『화엄경(華嚴經)』을 강설(講說)하도록 하고, 친히 주3(行香)하였다. 삼모부인은 일찍이 화엄과 연결되어 있어서 황룡사 불사에 참여하였다. 반면에 만월부인은 유가(瑜伽)와 연결되어 있었다. 왕비의 교체는 곧 화엄과 유가가 교차되는 양상을 보여주는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참고문헌

원전

『삼국사기(三國史記)』
『삼국유사(三國遺事)』

단행본

이영호, 『신라 중대의 정치와 권력구조』(지식산업사, 2014)
한준수, 『신라중대 율령정치사 연구』(서경문화사, 2012)
곽승훈, 『통일신라시대의 정치변동과 불교』(국학자료원, 2002)
김수태, 『신라중대 정치사연구』(일조각, 1996)

논문

조범환, 「『삼국유사』 왕력편의 異種記事를 통해 본 중대신라의 정치구조-신라 중대 경덕왕의 왕비 교체와 정치적 동향을 중심으로」(『신라사학보』 30, 신라사학회, 2014)
이영호, 「통일신라시대의 왕과 왕비」(『신라사학보』 32, 신라사학회, 2011)
김지은, 「경덕왕대의 대일외교」(『신라문화』 30, 동국대학교 신라문화연구소, 2007)
전덕재, 「신라 중대 대일외교의 추이와 진골귀족의 동향」(『한국사론』 37,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1997)
주석
주1

상주(喪主)가 된 사람을 위문하는 뜻을 적은 편지.    우리말샘

주2

신라 경덕왕에서 혜공왕 7년(771)에 걸쳐 만들어진 종. 어느 승려의 권고로 한 여인의 무남독녀를 가마솥의 쇳물에 넣고 나서 제작에 성공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국보 정식 명칭은 ‘성덕대왕신종’이다.    우리말샘

주3

재식(齋食) 때 시주가 먼저 승려들에게 향을 나누어 줌. 또는 그런 의식.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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