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시랑(未尸郎)은 흥륜사 승려 진자(眞慈)가 미륵불이 세상에 화랑으로 태어나기를 기원하여 나타난 인물이다. 진자는 꿈속에서 어떤 승려로부터 웅천(熊川, 지금의 충청남도 공주) 수원사로 가면 미륵선화(彌勒仙花)를 볼 수 있다는 말을 듣고 그곳으로 가서 어느 미소년을 만났다 그러나 진자는 그가 미륵선화인지 알지 못하였다. 이후 왕경(王京, 지금의 경주)에서 미시랑을 다시 만나 그가 미륵선화임을 깨닫고 진지왕에게 보였더니 왕은 미시랑을 국선(國仙)으로 삼았다. 미시랑은 7년 동안 활동하다가 행방을 감추었고, 진자 역시 그를 그리워하다 세상을 마쳤다.
미시랑에 대해 『삼국유사』에서는 “‘미(未)’는 ‘미(彌)’와 음이 서로 가깝고, ‘시(尸)’는 ‘력(力)’과 글자의 모양이 비슷하다”고 하여 미시의 이름은 미력, 즉 미륵(彌勒)을 가리킨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화랑이 곧 미륵불이라는 인식은 화랑이었던 김유신의 무리를 ‘ 용화향도(龍華香徒)’라고 일컬은 데서도 알 수 있다. 용화는 미륵불의 정토인 용화세계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또한, 화랑인 죽지랑의 탄생과 관련해서도 미륵불이 등장한다.
미시랑의 국선 임명에 진자 못지않게 적극적이었던 인물로 진지왕이 등장한다. 이는 그가 인재를 선발하여 왕권 강화에 이용할 정치세력을 형성하고자 하였음음을 보여준다. 이렇듯 미시랑에 대한 기록은 진흥왕 대부터 진지왕 대까지 이어진 화랑제도에 대한 정보를 알려줄 뿐만 아니라 화랑에 대한 인식을 보여주는 기록으로서도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한편, 미시랑이 국선이 된 이후의 활동은 풍류(風流)를 세상에 빛낸 것으로 표현되고, 화랑에 소속된 사람들의 명단을 ‘풍류황권(風流黃卷)’으로 부른 것으로 보아 미시랑을 포함한 화랑의 사상적 배경을 풍류도(風流道)로 보기도 한다. 진흥왕이 나라를 융흥하게 하려면 반드시 풍월도(風月道)를 진흥시켜야 한다고 생각하며 화랑을 선발하였다는 점을 통해 풍류도와 풍월도는 같은 의미로 볼 수 있다.
이때의 풍류는 화랑이 서로 연마하고 산과 물을 찾아 노닐며 견문을 넓히는 모습을 가리킨 것으로 보이는데, 신라 하대 최치원의 해석에 따르면 어느 하나의 사상이나 종교에 치우치지 않고 유교 · 불교 · 도교를 모두 포함하는 것을 풍류로 인식하였음을 알 수 있다.